•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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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7-01-20 20:26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知識産業社/1986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1,643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知識産業社/1986
    차례
    머리말
    Ⅰ.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 위해
      아이들을 사귀고 친하는 길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 위해
      유치원 선생님
      한 아이의 자살
      아이들의 글
      국어교육에 문제 있다
      글짓기 교육과 아동문학

    Ⅱ. 어린이를 살리자
      어린이는 있는가
      어린이를 살리자
      어린이를 섬기는 일

    Ⅲ. 자연과 더불어 살게 하는 교육
      남의 글 고치기
      향기롭지 못한 이야기
      교사의 숙명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책
      자연과 더불어 살게 하는 교육
      상(賞)에 대하여
      어린이를 생각한다
      공부와 독서
      어머니 사랑
      농민과 놀이
      구호(口號)
      청소 시간
      겨울방학의 생활교육
      초목같이 싱싱하게 자라나는 여름방학이 되도록

    Ⅳ. 매미 소리
      서울
      마음의 여유
      매미의 소리
      가을과 아이들
      나의 이웃들
      잊을 수 없었던 일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상의 삶
      나를 키워 준 노래

    본문 그림 ― 이철수

    머리말
     여기 이 글들은 거의 무두 신문․잡지사의 청탁에 못이겨 그때 그때 쓴 짧은 글들이다.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이 마음내키지 않고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한편 생각하니 아무리 단편적인 글이라도 내 진정을 담은 것임에 틀림없다면 글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져야겠다고 깨달아져서 용기를 낸 것이다.
     제 1부는 교단 수상이라 할 글들이고, 제 2부는 어린이를 보는 관점의 근원을 찾아본 글들, 제 3부는 신문․잡지에 실었던 시사적인 얘기를 쓴 글들, 제 4부는 수필․수상―대체로 이렇게 나누었다. 전체로 보아서 어린이의 교육을 걱정한 것이 대부분이기에 책 이름도 이렇게 붙였다.
     어린이와 교육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을 가지시고 이 책이 나오도록 해주신 지식산업사 사장 김경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85년 10월 이 오 덕

    남의 글 고치기
     자기가 쓴 글이 신문이나 책에 실렸을 때, 거기 틀린 글자나 빠진 글자 글줄이 있으면 참으로 불쾌하다. 한두 자가 잘못되어도 그 글의 뜻이 필자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왜곡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 발표되어 나올 때마다 이런 일이 생겨날까 싶어 긴장이 된다.
     활자의 오식(誤植)을 바로잡지 못한 이런 일 말고도 편집자들이 일부러 글을 고치는 수가 있다. 내가 가끔 쓰는 학교의 얘기 속에 「청부」가 나오는 일이 더러 있는데 교직에 있는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이 고용원의 직명이 내 글에서 한번도 그대로 활자화된 일이 없다. 어느 신문이고 어느 책이고 모두 「청소부」로 고쳐져 나왔다. 잘못 쓴 줄 알고 편집자들이 그렇게 고친 것이다.
     활자의 오식을 교정하지 못한 일이나, 선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극히 드문 경우가 되겠지만) 원고 수정은 그 결과가 아무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참을 수 있다. 편집자들이 함부로 남의 글을 난도질하여 엉망으로 만들고 그 내용을 바꿔 놓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편집자들에 의해 가장 크게 봉변당한 일이 세 번 있다.
     한번은―약 4년 전이라 기억한다―ㄷ신문사에서 전화가 와서, 오늘 ㅈ신문 7면에 나온 기사 가운데 지방행사 때 국민학교장을 우대하여 앞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겠다는 대통령 지시가 나와 있으니 그것을 보고 소감을 써 달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신문에 낼 것이 그렇게도 없는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당장 그걸 받아 가지고 또 뭘 얘기하도록 하는 신문사의 짓이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나대로 할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썼던 것인데, 다음날 신문에 난 내 이름과 사진까지 박힌 글을 보고 놀랐다. 글의 핵심 부분이 내 생각과는 전혀 어긋나게 날조되어 나왔던 것이다. 이걸 세상 사람들이 읽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당신 이름으로 우리가 글 하나를 써 낼 것이니 그리 아시오』라고나 할 일이지, 원고를 청탁해 놓고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신문사에 항의를 했더니 담당기자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말로 사과하는 것으로 어찌 해결될 일인가? 기자를 상대로 하다가 안 되어 편집국장 앞으로 등기 편지를 부쳤다. 일의 경위를 말하고, 그 글이 잘못 고쳐져 나온 사실을 신문기사로 내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회답조차 받지 못했다. 편집국장이라면 그렇게 도도한 자리일까? 지금도 나는 그때 신문사에서 주서(朱書)로 마구 뜯어고쳐 놓은 원고를 보관하고 있다.
     차라리 깡패들한테 반죽음이 되도록 두드려맞았더라도 그 때 그 일보다는 덜 속상하고 덜 분할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몇 달 후였다. 어느 출판사에서 여러 사람의 자전적 수상록을 낸다고 원고를 청하기에 약 50장을 써 보냈다. 책이 되어 나온 것을 보니 내 글이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특히 농촌교육의 실정을 얘기한 부분은 사실과 달리 멋대로 고쳐 놓았다. 여기 저기 수백 자씩을 함부로 깎고 보태고 하였고, 고친 데가 수십 군데나 되었다. 글의 제목부터 말이 안 되게 고쳐졌다. 출판사에 달려가 왜 이 모양으로 고쳤는가 물었더니 『농촌학교의 실정이 설마 그럴까 의심이 되어 대강 적당히 고쳤습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거짓 얘기를 썼다는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 사는 사람이 경상도 산골의 사정을 그 경상도 산골에 사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인가? 참으로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이 어느 때라고 거짓말을 한 마디라도 쓸 수 있는 세월인가 하고 하나 하나 글줄을 따져서 항의했더니 잘못했다면서 다음 재판이 나올 때는 꼭 바로잡아 놓겠다고 했다. 그 뒤 재판본을 받고도 설마 원고대로 바로잡았겠지 하고 읽지도 않고 있다가 최근에 무슨 일로 그 책을 찾아 읽고는 놀랐다. 겨우 몇 군데만 바로잡았을 뿐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걸 죄다 원고대로 바로잡자면 책 전체의 페이지 수를 늘여야 되고 따라서 경비가 들고 해서 몇 군데만 적당히 고치고 만 것이 분명했다. 그 책은 지금도 책방에 나돌고 있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세 번째는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잡지사의 요청으로 준 원고가 또 그 지경이 됐다. 이번에는 어떤 편집자의 편협한 문장관(文章觀)에 의해 그렇게 된 것 같다. 조금이라도 자기 글투에 안 맞으면 다 뜯어고친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쓴 것을 「나는 사람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고친 따위다. 이렇게 해서 겨우 20장이 되는 글을 수없이 첨삭을 멋대로 했으니 어이가 없다. 어떤 곳은 원고지 한 장 반의 분량을 아주 깎아 없애고는 엉뚱한 말을 대신 써 놓았다. 세상에 이런 폭행이 어디 있는가? 이 편집자가 얼마나 남의 글을 제멋대로 고쳤는가 하는 것은, 「내가 서울에 가면」이라고 써 놓은 것을 「서울에 오면」이라 고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글 머리에 필자가 경북 성주군 어느 학교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밝혀 놓고서 이렇다. 글을 고친 사람이 서울에 있으니 자기 중심, 자기 표준으로 「서울에 오면」이라고 쓴 것이다. 편집자의 무지와 횡포가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그 잡지에서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도 그 모양으로 칼질을 당하는 모양이다. 내 글이 실린 다음 달에 어느 작가의 글이 역시 그 난에 실렸었다. 시골의 어느 농사꾼이 한 말을 옮겨 쓴 대문이 있어 『…하느님이 변만은 각자 누도록 만드셨다』고 나왔는데, 알고 보니 「똥」을 「변」으로 고쳐 놨던 것이다. 『세상에 농사꾼이 누가 변이라고 말해요?』하고 그 작가는 화를 냈다. 어째서 똥을 변으로 고쳤을까? 똥이라면 더러운 말이니 신사 숙녀들이 보는 거룩한 잡지에 그런 불결한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똥은 「변」으로 변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학교의 글짓기 지도를 생각하게 된다. 일부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글을 멋대로 고쳐서 상을 타고 신문 잡지에 내어 교육의 성과를 선전하고 있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전개되고 있다. 나 같은 어른들이야 아무리 그런 테러를 당하더라도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만 당하기만 한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아이들은 그래서 그 재능과 성격과 의식 상태가 비정상적으로 비뚤어지고, 그 생명이 시들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 성경에서도 어린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마땅히 목에 돌을 매달고 물속에 빠지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가 싶다.  (1985. 4 《교우》) (p.91~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