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펴낸 책

  •  
    작성일 : 2007-03-01 15:02
    이오덕 교육일기①/한길사/1989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1,910  
    이오덕 교육일기①/한길사/1989
    차례
    머리말
      제①부
    1. 이 아이들만은 언제까지나
    2. 청소 잘하면 교육은 다 돼
      제②부
    1. 지각한 학생을 패라고 했어요
    2. 강습회의 만장일치 결의
    3. 누가 아이들을 병들게 하였나
    4. 서류만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죠
      제③부
    1.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상납해라
    2. 우리 교육이 어찌 의무교육이오
      제④부
    1. 서울 학교, 시골 학교
    2. 분교장길 30리
    3. 보내지 못한 위문편지
    4. 이농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
    5. 약초 캐서 회비 내는 1학년 아이

    머리말

     교직에 있으면서 그날그날 적어 두려고 애썼던 일기를 여기 책으로 공개하게 되었다.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 내게 된 이 일기에는 1962년 9월부터 1972년 7월까지, 그러니까 대체로 공화당 박 정권 앞기 10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적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64년 10월에 나는 교감으로 승진 발령을 받아 2년 5개월을 근무한 다음 다시 교사로 돌아가 지방의 한 도시 변두리 학교로 옮겼지만, 거기서도 견딜 수가 없어 1년 뒤에는 어느 산골 분교장으로 가게 된다. 버스 길에서 30리를 걸어야 들어갈 수 있는 그 분교장의 교육과 생활은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는 거기서 참으로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이때 지도한 아이들의 글이 『일하는 아이들』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그 분교장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시 한 달 동안 큰 도시 어느 학교로 옮겨 근무하다가 또다시 교감 발령을 받아 산골 학교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2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당하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 동안에 씌어진 이 일기에는 파란 많던 내 43년의 교직 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괴로워하고 울분에 넘치고 몸부림치던 시절의 삶이 나타나 있다고 본다.
     일기를 책으로 내는 것을 무척 망설였지만, 결국 이렇게 공개하기로 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행정이나 장학행정이랑 것이 일선 학교의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 행정의 정체를 내가 쓴 이 교단일기는 밝혀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행정의 도구로 전락한 한국의 교육이, 문교부나 대한교련에서 내는 통계 자료나 신문․잡지의 미화된 기사들과는 달리 일선 교단에서 얼마나 참담한 꼴로 이뤄지고 있는가를 내 기록은 증언할 것이다.
     둘째, 한국의 교사들이 비인간적이고 반교육적 구조 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병들고 있는가, 그리하여 그들이 맡아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을 역시 그렇게 인간스럽지 못하게 살아가도록 몰아붙이고 있는가를 내 글은 밝힐 것이다.
     페스탈로치 같은 사람이 만약 우리 교육계에 있다면 어찌 될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교사로 낙인이 찍혀 산골 어느 학교에서 묻혀 지낼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불행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행정의 중압을 물리치려고 열렬하게 싸우는 투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다가 벌써 오래 전에 학교를 쫓겨 났거나, 모두가 가기를 꺼려 하는 벽지를 전전했을 것이다. 이 기록은 무수한 참교육자들이 쏟아져 나올 법한 우리의 분단 44년 비통한 역사에서, 어째서 가슴에 번쩍번쩍 자랑하는 훈장 타는 교육자는 많지만 위대한 교육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에도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 목표를 어떻게 세워야 하고, 장학을 어떤 태도로 해야 하며 교육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데 적지 않은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내는 세 번째 까닭이 이렇다.
     이 일기에 나오는 곳은 경북이다. 그러나 강원도고 충청도고 제주도고 경상도고 학교 교육의 양상은 똑같은 것이 우리 교육의 또 하나 불행한 특징이다. 다만 이 기록은 수십만 교사들의 삶의 한 부분, 그러나 매우 중요한 부분을 보여 주는 것이라 믿는다.
     한길사 김 사장님의 권고와 독촉을 감당할 수 없어 일기장을 정리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때그때 고달픈 시간에 쓴 것이라 여전히 부끄럽고, 독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내 일기에 나타난 지난날의 직장 동료들, 교육계 선후배들, 혹은 문우들이 순전히 내 안목으로 그려져 있어, 이것이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까 싶어 마음에 켕기었지만, 나는 어떤 개인을 두고 그 실수를 드러내려고 한 것은 전혀 아님을 특히 밝혀 두고 싶다. 다만 우리는 어떤 교육자든지 아이들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부터 얼마나 엉터리 교육자였던가를 내가 쓴 일기가 잘 말해 줄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용서 없는 비판을 바랄 뿐이다.
                                                    1989년 4월 지은이 씀

    1. 지각한 학생을 패라고 했어요

     1964년 12월 31일

      어느덧 또 한 해가 다 가 버렸다. 내가 여기 온 지 꼭 석 달이 찼다. 오늘 종업식을 했으니 앞으로 한 달은 방학이라, 겨우 한숨을 쉬면서 오늘밤은 이렇게 앉아 생각하고, 그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여기 대강이라도 적어 두기로 한다. 참으로 몸서리나는 이곳의 생활을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만두어야 하겠는데 마음대로 안 될 것 같아 죽고 싶도록 괴롭다.
     이 학교는 ㅎ면소재지에서 20리, 학생은 450명, 교원은 교장․교감을 포함해서 모두 7명이다. 작은 학교라도 좋으니 (멀미를 심하게 해서 교통수단으로 기차밖에 이용할 수 없다고) 철도 연변에 보내 달라고 장학사들한테 두어 번 말만 했던 것뿐이라, 그래서 이런 벽지 학교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크게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굳이 시끄럽고, 마음에도 없는 아니꼬운 짓만 흉내내야 하는 철도 연변의 학교보다는, 교통이 좀 불편한 곳이 오히려 자유스럽고 교육을 잘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들은 내가 이런 학교에 오게 된 것을 퍽 딱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같이 있던 청리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그런 태도였고, 함창의 ㄱ선생은 언젠가 역에서 만났을 때 “선생님, 참 놀랍습니다”하고 몹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영전이다 좌천이다 하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청리를 떠날 때 웃는 낯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내가 교감이라도 되어 전근을 가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지, 여기가 아주 내 뼈를 묻을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서먹서먹한 객지요 나그네였다. 그러니 떠날 때도 어떤 사람들처럼 눈물을 흘린다든지, 감상에 젖는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선연히 (남들이 보기에는 참 인정이 모자란 사람같이) 떠나서 다시 새로 찾아든 곳도 역시 언제나 그런 곳으로 처음부터 임시로, 나그네 마음으로 찾아드는 것이다. 내게는 이 세상이 언제나 낯선 나라요, 나는 영원한 나그네다.
     석 달 전 찾아온 이곳은 학교의 자리가 아늑하고, 아이들이 순박하고, 작은 학교의 조용한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교직원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장이란 사람은 지극히 무능한 호인형(好人型)이란 점은 좋다고 하더라도 직원을 통솔할 줄 모르고, 교육에 대해서는 옛날 식민지 시대의 군국주의 교육밖에 아는 것이 없고, 완미고루한 데다가 사람을 대할 때 가끔 지극히 불쾌한 기분을 상대방에게 주는 말을 하여, 나도 처음엔 어리둥절할밖에 없었다. 여러 번을 좀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참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한번은 좀 따끔하게 충고를 했더니 뜻밖에도 아무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쑥 기어들어갔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위엄을 보이기 위해 그렇게 일부러 대한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부임했다가 다시 이삿짐을 가지러 전임지에 갔다 왔을 때다. 저녁때에 온다고 해 놓고 마침 차편이 있어 아침에 왔더니 교장의 말이 이러했다.
     “왜 약속을 어겼어요?”
     약속을 왜 어겼느냐는 이 말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이나 거듭 말하는 데는 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아무것도 준비해 놓을 것이 없고, 저녁에 온다고 했다가 당겨서 아침에 왔으면 더 빨리 왔으니 반갑다고 좋아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자꾸 약속을 어겼다고 나무라기만 하니, 대관절 이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제 처음 대하는 사람, 이제부터 같이 있게 될 직원에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참았다. 처음 대하는 사람이고, 사람이란 가끔 실수도 있거니 해서 참았던 것이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사사여행(私事旅行)을 갔다 온 직원 한 사람이 여행 날짜를 줄여서 일찍 돌아왔다. 밤에 나한테 찾아와서 얘기하고 갔는데, 그 다음날은 휴일이라 다음다음날 출근했다. 교장이 왜 교감한테까지 와서 얘기하면서 나한테는 안 왔나 했다가 그 선생한테 톡톡히 반격을 당했던 모양이다. 내가 직원실에 가니 교장이 이번에는 나한테 불평을 했다. 왜 ㄱ선생이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나 한다. 나는 그 전의 일도 생각이 나서 한꺼번에 내 생각을 다 말하고, “교장 선생의 할 일이 뭡니까?”하고 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교장은 찍소리 못하고 또 쑥 기어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도리어 불쌍하다는 느낌이 났지만, 어쨌든 참 소인(小人)이란 말이 알맞았다. 교육이란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다만 학교장의 자리에서 그 위신만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조그만 그 무슨 형식 같은 것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못난 사람이다.
     이런 정도의 일들로 하여 이따금 일어나는 교장과의 사이의 조그만 파란은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불쾌하게 여기는 두 선생이 있다.
     처음 부임하여 이틀쯤 되었을까.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까 바로 앞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는데 내다 보니 선생들이다. 사무실 앞에 감나무가 있는데, 한 사람은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있고, 한 사람은 떨어진 감을 주워 모으고 있다. 청부도 함께 거들고 있었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이럴 수 있는가?
     도무지 이 학교의 질서라든가 풍습을 짐작할 도리가 없어, 밖을 보고 “교장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든지, 직원회의에서 의논해서 따는 것이 좋지 않은가요?”했더니 “이거, 뭐, 괜찮습니다”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대답이었다. 그날 감은 반쯤 땄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뒤 직원회가 있었기에 내가 직원들의 근무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바로 그 감 이야기가 되어서 학교의 일이 모두 그 차례가 있다고 했더니 한 직원이 즉석에서 말했다.
     “교감 선생님, 저 봐요. 어제 교장 집에서 다 따 갔잖습니까?”
      그제야 감나무를 쳐다보니 감이 한 개도 없다. 참 어이가 없었다. 철없는 선생들이나 그 선생들을 닮아서 감을 따 가는 교장이나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의 물건이나 생산품을 서로 먼저 가져가는 것이 임자가 되어 버린 상태라면 이 학교가 교육면에서고 관리면에서고 얼마나 황폐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 뒤 이 감 사건이 이 학교 직원들의 근무 태도, 분위기를 한 마디로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잊을 수가 없었다.
     감 사건 이후, 나는 제주도에서 온 ㄱ선생을 자주 타일렀다. 이 선생의 태도가 참 맹랑했다.
     하루는 선생들이 기성회비를 받아서 써 버리고는 안 낸다고 타일렀더니, ㄱ선생의 말이 이러했다.
     “그거 좀 유용하면 어떻습니까!”
     그는 3학년 담임이다. 수업을 제멋대로 단축해서, 오후 수업은 안 하고 아이들을 일찍 돌려보내기 예사다.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더니,
     “음악 진도가 다 나가서 가르칠 것이 없어요.”
    했다.
     “선생님은 이전에도 그랬어요?”
    했더니 전에도 오전 수업만 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사무 볼 것이 있으면 언제나 수업 중에 다 처리하고, 오후에는 제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잔다. 수업 중에 신문을 본다고 교장이 주의하면,
     “수업 시간 중에 신문 보는 것과 근무 시간 중에 신문 보는 것 무엇이 달라요?”
    하고 되묻는다. 보결 수업에 들어가라고 하면 아주 “못 들어가겠습니다”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붙잡고 타이르거나 책임을 묻거나 하는 노릇이 다 부질없다. 설을 쇤다고 일찍 가겠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더니 제멋대로 가 버렸다. 일직이고 숙직이고 사무 처리고 다 내버리고 가 버린 것이다.
     ㄱ선생이 가고 난 며칠 뒤 그 반에서 수라장이 벌어졌다. 두 시간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사무실에 들어가려는데, 저쪽에서 고함 소리, 울음소리가 나기에 가 봤더니 3학년 교실 뒤편 출입문을, 안에서는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울면서 밀고 나오려 하고, 밖에서는 남학생들 몇이서 필사적으로 닫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밀고 때리고 밑에 깔리고 하여 난장판이다. 들이닥친 아이들에게 떠밀려 드디어 문짝이 벗겨 넘어져, 아이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여학생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다. 몹시 얻어맞은 모양인데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있었나? 어찌 됐나?”하고 물으니 “지각했다고 남학생들이 마구 패요”한다. “지각했다고?” 교실에 들어가니 먼지가 자욱해서 곧 나와 교무실로 와서 정신없이 앉았는데 아이들의 울음을 그대로 들려왔다. ㄱ선생이 생활 지도를 제대로 했을 리가 만무하니 필경 폭력 교실이 됐구나 싶었다.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셋째 시간은 다른 선생이 보결 수업으로 들어가게 하고, 넷째 시간에 내가 들어갔다. 먼저 급장에게 물어 보니 좀처럼 말을 바로 안 하고 자꾸 속이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어 앞에 나오라 했다.
     “이놈, 네가 남을 때렸으니 너도 매맛을 좀 봐라.”
    하고 종아리를 때려 놓고는 다시 말하게 했다.
     결국 일은 이렇게 됐다. 급장이 지각한 여학생을 때리려고 나오라 하니 안 나와서 한 여학생을 때렸더니, 다른 남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여학생들을 두들겨팼다는 것이다.
     “우리 선생님이 지각한 사람을 때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놀랐다. 사실인가 싶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그렇다고 했다.
     “우리 선생님이 지각한 학생을 한 줄로 세우고 책보로 눈을 싸매 놓고 패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만일 여러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무엇을 훔쳐 오라고 한다면 그 말대로 따르겠습니까? 안 따르겠습니까?”
     아이들은 모두
     “안 따르겠습니다.”
    고 말했다.
     “아무리 선생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따르지 말아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나라에 이런 교사가 얼마나 될까?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교사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막대한 돈으로 시설을 해 놓은 사범교육을 받고 나와서 선생님, 선생님이라 불리면서 남의 귀한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을 가르치는 폭력의 교실―어쩌면 그것은 이 나라 교육의 축도일는지도 모른다.
     이 ㄱ선생 다음으로 또 하나 제멋대로 생겨먹은 ㄹ선생이 있는데, 그도 다음해에는 군대에 간다고 하여 걸핏하면 “까짓 거 뭐, 명년에는 논산 가는데…”했다. ㄹ선생도 오늘 종업식이 끝나자 회의도 마치기 전에 핑 가 버렸다. 경리사무를 감사라도 할 것같이 불평만 하더니, 오늘 아침에 자기가 맡고 있는 생산품 처리대장을 정리하는 일과 현금을 예금할 것을 잊지 말라고 했을 때 “예, 해 놓지요” 하고 대답까지 하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물론 돈까지 그대로 가지고 가 버렸다.
     경리사무 책임자―이것이 교감으로서 가장 귀찮은 노릇이다. 나는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국민학교의 경리사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경리계, 교감, 교장 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나, 돈을 보면 어떻게 환장이 되어 버리는가 하는 것을 새삼 생각했다. 최근에 겪은 일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인간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들었다.
     내가 부임한 며칠 뒤 교장은 나에게 판공비를 달라고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접대 비용은 그것대로 다른 항목의 돈으로 지출하고 판공비는 교장이 따로 먹자는 수작이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럴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조심스럽게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고 했다. 그것은, 아직 그때는 경리에 대해서 통 어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 교장은 이곳저곳 술집의 빚을 갚는다고 돈을 냈다. 자기가 앉는 의자의 덮개를 새로 만들었다. 경리 담당인 이 선생은 내가 돈을 내려고 하면 이것저것 핑계를 대어 내 주지 않으려고 했다. 누가 보아도 당연히 지출해야 할 것, 거의 절대적인 일에도 그랬다. 그러면서 나한테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교장 말은 그대로 듣고 서류를 만들어 왔다. 나는 경리사무를 몰랐고, 또 부임한 지 며칠이 안 되는 터라 여러 번 그대로 도장을 찍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신탄비’로 나온 돈 1만 4,800원을 교장이 인출하자고 했다. 나는 그것을 모두 낼 것이 아니라 마세크탄과 장작값 줄 것만 내자로 말했다. 그런데 직원들이 한 자리에서 듣고 있다가 그것 모두 인출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래 할 수 없이 나도 동의했다. 그 돈을 교장이 찾으러 갔다. 읍까지 갔다 와서 접대비로 얼마, 빚돈으로 얼마 청산했다면서 쪽지에 적어 나한테는 주지 않고 경리계에 주었다. 경리계가 나한테 가져와 보였다. 나는 매우 불쾌했으나 그것으로 시비할 것까지 못 된다 싶어,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마음속에 다짐만 했다.
     그런데 그저께는 연말이라 결산을 해야 되었다. 경리계가 아침 계산한 것을 보여 주면서 통장의 현금을 인출해서 여비와 직원들이 대납한 것을 모두 갚을 수 없고, 모자란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XX당과 그밖의 술집에 깔린 해를 넘어 온 묵은 빚들이 모두 합해서 1만 몇 천원이라 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기 와서 진작부터 학교의 빚이 얼마나 되는가 교장한테 물었다. 교장은 잘 모르니 경리계테 물어 보라 했다. 경리계는 또 조사해 봐야 한다, 계산해 봐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뒤로 미루더니 일주일쯤 전에는 한 2천 원밖에 안 될 것이라 해서 큰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만원이 훨씬 넘는다니 그 무슨 수작인가.
     나는 물론이고 이종호 선생은 “신탄비 1만 4천 원을 어디 다 썼나?” 하고 수판을 내 놓고, 다른 선생들도 흥분했다. 교장도 놀랐다(놀라는 척 했겠지). 경리계 자신도 놀라는 척했다. 아침 직원회에서 이 문제가 나와 왈가왈부로 떠들썩했다. 나는 그 며칠 전 조회에서 ㅎ도 출신의 ㄱ선생이 교장과 다투다가 어떤 말 끝에 경리 문제를 들고 나와서 경찰에 고발하겠다고까지 위협한 일도 있고 해서, 이거 정신 못 차리면 큰일을 당하겠다 싶어 단단히 각오를 했다.
     사실 직원회 자리에서 이 학교만큼 경리 문제로 거의 날마다 얘기가 나와 말썽을 일으키는 학교는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내가 부임할 때 이 학교에서 전출한 세 사람의 교사는 아이들한테서 거둔 기성회비를 거의 모두 집어먹고 내 놓지 않았다. 한 사람은 5천 얼마, 다른 두 사람은 3천 얼마씩, 그리고 내가 담임하게 된 1학년을 맡았던 ㄱ교감 선생은 아이들한테서 받은 책값, 저금돈, 회비 같은 것을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이것을 정리하는데, 관심이 많은 이곳 학부모들의 여론도 있고 해서 정말 땀을 뺐다. 그래도 아직 정리를 다 못 하고 있다. 편지를 수없이 써 보내고, 나중에는 기성회장 이름으로 공적인 편지를 보내고, 법 문제까지 암시를 해도 배짱을 부렸다. 참으로 철면피한 사람들이다. 이런저런 일로 해서 나는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졌다.
     그래 그날 조회에서, 앞으로 일체 비공식적인 지출은 안 할 것이라고 선언을 했던 것이다.
     “며칠 전 김 선생님 말씀같이 연말연시에 교육장, 과장님 들에 대한 선물, 교장에 대한 고기근이라도 사 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얘기도, 또 설날 술 한 잔이라도 나눠야지 하는 의견도 이젠 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비용은 앞으로 일체 교비로는 지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 묵은 빚도 내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만 갚을 것입니다. 내가 온 뒤로 교장 선생님이 맘대로 지출한 것 중에도 하나하나 따져 볼 것은 따져서 갚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태도를 가장 싫어한 것이 경리계였다. 그는, 내년에는 경리사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여러 날 전 숙직실 내 방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다른 학교에서는 연말이 되면 교장, 교감, 경리, 이렇게 세 몫으로 다 나눕니다” 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계산서 같은 것을 보고 질문을 하면 이상야릇한 것이 가끔 나왔던 것이다. 여비에 대해서는 처음엔 실비도 낼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더니, 뒤에는 정당한 여비를 주도고 돈이 남는데 이건 다른 항목으로 지출할 수는 없고 교감 앞으로, 그리고 경리계 자기 앞으로 달아 놓고 다른 교비로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여비가 늘 실비가 안 된다고 말썽이 많던 지난날 일이 생각난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아직도 실비가 될까말까하다는 모호한 말만 하고 있었다. 나는 남는 여비를 그렇게 처리할 수 없다, 그걸 여비로 지출 못하고 도로 반납해야 할 것 같으면 직원들에게 모두 똑같이 (실제로 출장을 많이 했으니) 나누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놓았지만, 이것은 오늘 오후 돈을 찾아 내일 계산해서 지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정직하게 경리를 운영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경리계뿐 아니다. 교장도 그렇고, 심지어 직원들도 모두 그런 눈치다. 제멋대로 하는 두 젊은 남자 선생은 평소에 불평만 하다가 정작 그런 불평의 근원을 없애 주려고 하니 싫은 모양이다. 경리를 똑바로 하게 되면 제멋대로 놀아먹기가 어렵데 된다. 상대방의 약점을 붙잡고 큰소리를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교장이나 교감이, 저도 먹고 또 너희들도 먹어라 하는 식으로 술이나 대접하고, 기성회비며 잡종금 따위, 책값, 생산품 대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묵인하는―이른바 무슨 국물 거리가 생기는 어둑어둑한 상태를 그들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참 요새 젊은이들이 이러니 이 나라 앞날이 말이 아니다. 도덕도 없고 이성도 양심도 없어진 것 같고, 다만 돈에만 눈을 밝히는 것이 지금의 20대다.
     ㅍ도 출신인 ㄱ선생은 이 점으로 보아서 좀 다르다. 그는 호적상의 나이가 나보다도 많게 되어 있는데, 과거에 교장․교감을 지낸 경력까지 이력서에 적혀 있지만 다만 자격증이 없어 지금은 교사로 되어 있다. 그의 도덕관이나 인생관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이지만, 성격만은 아주 솔직하다. 그가 가끔 밤에 내 방에 놀러 와서 자기가 지나온 경력을 얘기했는데, 그 얘기가 너무나 많고 놀라운 것이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꾸며낸 얘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강직하면서도 제멋대로 하는 성격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어느 학교에 가서도 교장과 싸우고 교감과 싸우고 했는데, 그래서 그의 이력은 복잡하고, 이력서는 쓸 자리가 없어 다 못 쓸 정도다. 그는 자신이 교장이나 교감을 했을 때, 너도 먹고 나도 먹고 하는 식으로 몫을 나누었다고 했다.
     “어디 요새 안 그런 학교가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교사로 되고부터는 교장․교감에게 또 솔직하게 그런 태도로 대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자기한테 불리한 일이 있으면 책임을 대담하게 추궁했다고 한다. 그러자니 어디를 가도 오래 있지 못하고 수십 개의 학교를 전전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윗사람과 싸우다가 불리하면 또 더 윗사람을 찾아가서 때로는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난 해방 후 월남한 사람인데,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왔다가 이런 꼴을 당하니 될 수 있소?”하는 태도로 나왔다. 그래서 이 ㄱ선생 때문에 화를 입은 교장․교감도 많고, 장학사도 교육장도 상당히 있었지만, 본인은 역시 교사의 신분이라 일시의 배경으로 강자가 됐다가도 때가 지나면 자시 전락하곤 했다는 것이다.
     ㅊ군 어느 학교에서는 칠판닦개를 안 사 준다고 교장의 모자를 가져가서 대용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했다. 교장이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우리 그러지 말고 서로 잘 지내 보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이야기는 수없이 많았다.
     ㄱ선생은 교장과 나에게 주로 경리 문제를 가지고 좀 지나친 말을 여러 차례 했지만, 나는 그의 강하고 솔직한 성격을 좋게 보았다. 다 같은 이기주의자들이지만 교장과 경리계 교사의 음성적인 성격과는 판이했던 것이다. 그래 여기 온 뒤로 같은 직원 중에서 가끔 얘기를 나눈 사람도 그뿐이었다. 그리고, 교장과 내가 맞서서 말다툼을 할 때는 흔히 ㄱ선생이 내 편을 들었고, ㄱ선생이 교장과 언쟁을 할 때는 내가 ㄱ선생 편이 되었는데, 그것은 덮어놓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교장의 완미고루한 관료적인 성격과 태도가 번번이 나와 ㄱ선생에게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예를 앞에서도 한 가지 들었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ㄱ선생 아들 아이가 1학년에 나오고 있었다. ㄱ선생은, 아직 나이 어리고 공부도 못하니 임시로 좀 다니게 하다가 내년에 1학년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그럴 것 없이 지금 곧 정식으로 넣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럭저럭 여러 날을 지나다가 한번은 어떤 기회에 ㄱ선생이 내 의견에 동의를 하기에 나는 출석부에 이름을 써 넣었다. 이튿날 입학 결재부에 올릴 생각이었는데, 언제 교장이 출석부를 봤는지 누가 일러 주었는지, 결재를 맡지도 않고 출석부에 이름을 적어 놓았다고 교장이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몹시 불쾌한 말투로 나를 대했다. 나는 꾹 참고 운동장에 나가 조회를 마쳤다. 그 길로 들어와 교장에게 한바탕 하려고 했더니 ㄱ선생이 벌써 큰 소리로 항변을 하고 있었다. 같은 직원의 아이를, 그것도 임시로 입학해 줬다가 출석부보다 하루 늦게 결재를 맡는다고 담임인 교감을 여러 직원 앞에서 모욕적으로 말하다니, 내가 들어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한마디 했지만, 내가 아까 교장이 말할 때 즉시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우유부단한 내 성격에 비해 ㄱ선생의 그 솔직한 성격이 참 부러웠다.
     또 한번은 ㄱ선생이 담임한 2학년 여학생 가운데 열 세 살이나 되는 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런 아이는 아무래도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다닐 수 없을 것 같으니 월반을 시켜 주자고 제의했다. 그랬더니 교장은 규칙이 그럴 수 없다느니 하면서 내 의견을 전혀 들어 줄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처음부터 교장이 규칙이니 법이니 하는 것을 방패로 삼아 자기의 위신과 권위 같은 것을 이런 때에 유지하고 과시해 보이려 할 것이란 짐작을 했다. 그래도 한 아이의 장래가 교육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이런 문제를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묵살해 버리는 데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꾹 참았다. ㄱ선생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교장을 반박했을 것이다.
     ㄱ선생, 경리 선생, ㄴ선생, 제주도 ㄱ선생, 이밖에 여선생이 한 사람 있다. 초급 사대 출신이지만 교육을 잘 모르고, 이런 좋지 못한 분위기에서도 그런대로 근무해 가는 사람이다.
     석 달 동안 나는 참 긴 세월을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지금 교원의 인사 배치 문제, 벽지 교육의 정체 원인, 경리 문제, 그 밖의 여러 가지 고질화된 현장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런 문제를 기회 있으면 장학하는 사람들에게다 도교육연구소 같은 데 의논할 작정이지만, 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도저히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곳 온 지 석 달밖에 안 되어 허락될는지 모르지만, 이번 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교사로 강등하든지,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 내가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 이곳에서 탈주하는 길이다. 나는 지금 거미줄에 걸려 있는 나비가 되었다!  (p.57~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