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8-27 06:19
권태응 동요 이야기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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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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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 동요 이야기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2001 차례 ■ 책을 내는 까닭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주고 싶어 제1부 ■ 한평생과 작품 권태응의 한평생 남긴 작품 묻혔던 것을 드러내는 까닭 ■ 농사일을 보여주는 동요 ■ 아이들의 삶과 마음 ■ ‘감자꽃’ 이야기 이걸 어떻게 하지요? 〈감자꽃〉도 다 잃어 버리게 됐으니… 제2부 ■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노래 1. 풀과 나무과 함께 2. 짐승과 벌레, 그 정다운 우리 형제들 3. 들․하늘․날씨․철 4. 자연과 지식 5. 자연과 상상 ■ 나라와 겨레를 생각함 1. 해방의 기쁨과 새나라의 노래 2. 분단의 비극 3. 잘못된 세상과 힘든 삶 4. 나라 사랑 심어 주기 ■ 사람다운 마음 제3부 ■ 온갖 형태로 나타난 운율 1. 동요와 동시 2. 3(4)․4조 3. 7․5조와 그 변형 4. 3․4조와 7․5조가 다른 점 5. 한문 글자와 7․5조 6. 그 밖의 여러 가지 운율 ■ 푸짐한 우리말 1. 아름다운 말 2. 재미있는 시늉말 3. 잘못된 말 4. 사실과 다른 말 ■ 산문과 절필, 연보 1. 산문 2. 마지막에 남긴 작품 두 편 연보
■ 동요 찾아 보기
책을 내는 까닭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주고 싶어 우리나라는 농사꾼의 나라였습니다. 온 백성의 8할이 농사꾼이었으니까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9할도 더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서 생겨났고, 노래도 이야기도 춤도 농사꾼들의 것이었습니다. 두드리고 치고 불고하는 악기도, 그림도, 질그릇도, 집도 모조리 농사꾼들의 것이었지요. 다만 이 농사꾼 위에 올라 앉아 이들을 부리는 아주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농사꾼이 아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일하면서 그 자연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부지런한 몸가짐과 슬기로운 머리로 살아 온 우리 농사꾼들은, 우리 아리랑 나라의 빛나는 농사 문화를 만들어 내어 오늘날 우리 겨레가 이 땅의 주인으로 버젓하게 살아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사꾼들을 부리는 정치꾼이나 먹물꾼들은 손발 대신에 머리만 써서 남의 나라에 기대고 남의 나라 글자를 익혀 그것으로 정피를 하고 학문을 하고 교육을 하고 온갖 제도를 만들고 해서 돈과 권세를 잡아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나라를 팔아먹기까지 했지요 지금도 이들의 뒤를 잇는 친일․반민족․반통일의 무리들은 각계각층에서 이미 잡아 놓고 있는 돈과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여 끊임없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도 우리 역사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외국 세력에 지배되고, 농민-백성을 배반하는 길로만 나가다 보니, 이제는 그만 농촌도 농민도 거의 다 사라지고, 온 나라가 살벌하고 황량한 도시로 되어, 그 아름답던 자연도 병들어 무섭게 그 모양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곡식을 가꾸는 농사꾼의 삶은 천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도시에서 병들어 죽어도 고용살이로 돈벌이하는 영광을 누리고 실어하니, 이래서 농사꾼의 문화는 끝장이 나는 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학교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지식인들, 그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글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문이고 잡지고 낱권 책으로 온통 우리말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죽이고 우리말에 깃든 우리마음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학인들은 일제 시대부터 우리말을 가장 앞장서서 오염시킨 범죄자들입니다. 그들이 쓴 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가 농사꾼의 나라라 했는데, 그 농사꾼의 삶을, 농사꾼의 마음을 제대로 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과 함께 살아 온 농사꾼들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 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습니까? 지금도 시골 어디든지 가는 곳마다 허리 꼬부라진 늙은이들이 아직은 좀 안아 있어 그 깨끗한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 본 문인이 있는지요? 최근에 와서 농사꾼들이 아주 끔찍할 만큼 비참하게 되어, 농촌이 무섭게 바뀌고, 그 과정에서 어느 마을 어느 집에서도 기막힌 일들, 소설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어느 농사집을 찾아가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가 많고, 노래할 거리가 넘치고, 기록해 두어야 할 역사가 쌓여 있는데도, 이런 농사꾼과 농촌을 찾는 소설가 한 사람 없고 시인 한 사람 없고 수필가 한 사람 내 눈에는 안보이니 내 눈이 먼 겁니까? 그리고 그들은 소설과 시와 그 밖의 글감을 찾아 아프리카로 가고 남미로 가고 인도로 유럽으로 중국으로 갑니다. 이 좁고 보잘것없는 땅에서는 문학이 될 만한 글을 쓸 거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참 얼이 빠져도 예사로 빠진 것이 아닙니다. 모두 돈쟁이들에 빌붙어 글을 파는 가엾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반세기 전 이 땅에 한 시인이 있어 겨우 6년 동안 병상에서 동요를 쓰다가 33세로 이승을 떠났습니다. 권태응입니다. 동요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요, 아이들이 읽는 시지요. 그런 글을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마치 자기가 동요를 쓰기 위해 세상에 잠깐 왔다는 듯이, 밤중에도 쓰고 새벽에도 쓰고 했습니다. 그 작품들이, 오늘날 우리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마도 별것 아닌 것으로 비칠 것입니다. 무슨 별난 내용도 없고 말재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농사꾼들의 삶과 마음, 농사꾼 아이들의 세계를 이런 정도라도 보여 주고 노래해 보인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 문학사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권태응 시인의 동요를 살피면서 새삼 애달프게 생각한 것이, 왜 우리 문학에는 자연과 농사꾼 아이들을 노래한 이런 동요시인이 겨우 한 사람밖에 없나 하는 것이고, 또 이런 동요나마 어째서 반백년이 지나도록 묻혀 있기만 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인이 한 사람밖에 없는 까닭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문인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이 아주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백년을 묻혀 있어야 했던 것은 다른 까닭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이 시인이 그때 서슬 퍼런 그 친일 친미의 반통일 반민족 세력에 조금이라도 호감을 주는 작품을 단 한 점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너무 늦었습니다만 이제라도 이 시인의 동요를 좀 알려서 우리 역사와 문학을 살피고 교육과 그 밖에 모든 문화를 그 뿌리부터 반성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심어 주고 이어 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내딴은 글을 쉽게 쓴다고 애썼습니다만, 잘못된 먹물 버릇이 더러 나오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권태응 동요의 많은 작품들이 아직 세상에 발표되자 않은 상태기에, 보기를 들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전문을 들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몇 가지 다른 내용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보기로 들 작품이 거듭 나왔지만, 그렇게 해서 읽는 이들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견해나 말에 대한 풀이에서 혹시 잘못된 데가 있으면 누구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충북 민예총 회장인 도종환 선생이 모든 자료를 보내 주었기에 쓸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자료를 좀 더 보충해서 살피고 싶었지만, 저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롭게 혼자 그 짧은 평생을 우리 땅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만 우리 얼을 지키다가 떠난 권태응 시인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2001년 4월 이오덕 묻혔던 것을 드러내는 까닭 권태응의 동요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농사꾼과 농사꾼 아이들의 삶을 보여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 겨레가 이 땅에서 몇천년을 살아 온 역사는 바로 땅을 갈아 곡식을 심어 가꾸면서 살아 온 농사꾼들의 역사다. 우리가 온 세계에 자랑할 말과 글자를 가지게 된 것도 농사일을 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창조하고 노래를 즐기면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알맹이는 농민들의 말이고, 우리 문화의 바탕은 자연 속에서 일하면서 살아 온 농민들의 삶 속에 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정서도 농민들의 정서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문학이라고 알고 있는, 눈으로 읽는 글로 된 소설이나 시나 동화 따위들,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현대의 우리 문학에서는, 대단히 섭섭하게도 우리 겨레의 삶, 우리 농민의 삶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로는 어디까지나 그렇다. 어른 문학에 대면 아이들이 읽는 문학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여기 농민의 삶과 농촌의 정서를 노래한 동요시인 한 사람이 있다. 그 한평생이 너무 짧고, 그 짧은 평생이나마 병으로 시달리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지는 못하고 동요만 쓰다가 세상을 떠난 불행한 시인이다. 우리가 권태응의 동요에서 우리 농민과 농민의 아들딸들이 살아 온 모습의 많은 가닥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오늘날에는 우리가 옛날부터 이어 받아 온 농사일이 거의 다 사라지고 농촌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모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 산업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이어온 겨레의 삶은 아주 그 뿌리가 뽑혀 버리고, 낯선 삶이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그 자리를 메워 가고 있다. 삶이 변질되고 우리 것이 다 없어진 자리에 들어온 이 낯선 질서는 겉보기에 으리으리하도록 눈이 부시어 모든 사람의 얼을 뺀다. 그것은 또 사람들에게 놀랄 만큼 편리한 수단을 주고, 달콤한 향기와 맛을 즐기게 하여 잘살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자연 속에서 모든 목숨이 자라나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질서가 아니다. 자연을 더럽히고, 그 흐름을 꽉 막고, 모든 목숨을 죽이는 질러다. 가꾸고 기르고 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라 짓밟고 부수고 서로 빼앗는 미움의 질서, 서로 죽이고 죽는 죽음의 질서다. 편리하고 편안하게, 기분 좋게-다시 더 따질 여지가 없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되는 이 길만을 달려가기 위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 양심도 도덕도 쓰레기통에 죄다 들어갔다. 그리고 그 길을 달려가는 데 오직 한 가지 힘이 되는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된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돈은 곧 하느님이다. 돈에 환장하고 돈에 미쳐 서로 아귀가 되어 싸우는 사람들의 세상에는 정치고 교육이고 종교고 학문이고 예술이고 명예고 죄다 돈이다. 모든 일이 돈벌이가 되고, 모든 것이 돈벌이 대상이 된다. 문학도 돈벌이 수단이 되고, 아이들도 돈벌이 대상이 된 지가 오래다. 한 시인의 동요 작품을 말하는 자리에서 왜 이렇게 오늘날 이 막가는 세상판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권태응의 동요가 오늘날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씌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사회 질서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고, 그저 그 옛날 벌써 사라진 우리 조상들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면서 감상에 젖는 한편, 그 가난하게 살던 시대에 견주어 지금 우리들은 참 잘살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료로 느끼고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동요를 읽어야 할 아이들이 어느 정도로 이해할까, 어쩌면 우스개 만화처럼 읽을는지도 모른다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값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작품, 지난 날 자기들의 삶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여 스스로를 멸시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작품, 서양 사람들이 써 놓은 것보다 더 낯설게 여길 것 같은 동요라면 그만 그대로 묻어 두는 것이 좋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굳이 그것을 찾아내어 보이려 하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만화로 보든지 헛소리로 읽든지, 나는 우리 겨레의 삶을 따스한 가슴으로 노래한 이 동요들을 크게 드러내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가 이어 받아 가질 것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모든 것을 살리고 스스로도 살아나는 길을 찾아가자면, 바로 우리 것을 다시 찾아 가지는 수밖에 없다고 ale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 그것을 보잘것없다고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그런 겨레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19~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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