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9-03 23:05
삶과 믿음의 敎室 - 李五德敎育隨想集/한길사/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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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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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의 敎室 - 李五德敎育隨想集/한길사/1978 차례 책을 내면서 Ⅰ. 삶의 敎育 노동과 교육 베껴쓰기 교육 사랑과 자유 겉돌아 간다 인간의 가르침과 자연의 가르침 정서에 병든 어린이들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 교사와 자유의지 믿음과 억암 교사를 믿어야 한다 Ⅱ.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 이 아이들은 장차 어찌 될까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 마음 갖기 몸은 시골에 마음은 도시에 가짜교사 사건에 생각한다 어느 여교사의 인간 선언 흰 색과 검은 색 우상을 거부하는 사람 교회 어린이의 학교생활 日常은 살아 있다 Ⅲ. 믿음을 심는 문학과 교육 삶에 믿음을 심어 주는 교육과 문학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 아동시 교육 序說 Ⅳ. 斷想·時評 흙으로 만들기 모형 동물원 <학생관리>라는 말 초식과 육식 담배를 피우는 월남 아이들 무질서의 근원 <友邦>에 대하여 8월 15일에 쉬운 말 바른 근 한압과 <大前> 문명에 대한 경고 개인과 전체 소년체전 할 말 있다 비행접시 동심에 대하여 素朴에 대하여 스승과 제자 라디오 올림픽경기와 사격 나비의 꿈 사치분교장의 凱歌 세발 자전거 ■ 편집·제작·교정/金株植·金學珉
책을 내면서 교육을 하는 사람이거나 교육 일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간에 우리의 교육이 실제 현장에서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 데도 교육을 비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듯 잠잠하기만 하다. 인간의 생명을 가꿔가는 일보다 더 어렵고 문제 많고 힘드는 일이 없을 터인데, 이렇듯 두려운 일을 아무런 논란도 비판도 없이 조용하게 그야말로 질서 정연하게 하고 있다면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교육을 걱정하는 것이 무슨 금기 사항으로라도 되어 있단 말인가? 학자들은 점잖게 교육의 원론이나 되풀이하고 남의 제도나 학설 따위를 적당히 소개만 하면 그만인가? 교사들은 시험 성적이나 올리는 데 열중하면 다 끝나는가? 그런 것이 학자와 교원들의 할 일이고 양심인가? 교육이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랑 없이 생명을 피어나게 할 수 없는 것은 태양 없이 풀싹을 돋아나게 할 수 없는 이치다. 오늘날의 교육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물질만을 추구하기에 미쳐 있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근원적인 문제다. 그러면 사랑을 어떻게 하여 찾아 가질 수 있는가? 사랑은 오직 믿음에서만 생겨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의 착함과 참됨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데서 비로소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여 그들을 감기 감독하고 지시 명령만 하는 곳에서는 결코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그런 곳에서는 불신을 조장하고 미움의 감정을 심어주는 교육의 역기능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는 아이들을 들볶고 억누르는 일이 교육의 알맹이처럼 되고 경쟁을 시키고 등급을 매기고 상벌을 주는 것이 교육의 기술로 애용된다. 사랑의 세계에서 무한히 뻗어날 수 있는 아이들의 창조적 재능이 거기서는 무참히도 짓밟혀 다시는 싹트지 못하게 되고, 그 대신 동물원적인 자기 방어의 비참한 자세만을 아이들은 갖게 된다.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고, 그러면서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꾀를 익혀 남을 해치기를 예사로 아는 교활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아이들의 비뚤어진 삶을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그 아이들의 본성을 믿기 때문이지만, 아이들의 현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이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아이들을 멸시하면서 아이들이 병든 까닭을 아이들 자신에 돌린다. 벌을 주고 채찍을 쳐야 된다는 구실이 이렇게 해서 생긴다. 이런 사람일수록 현실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고, 아이들 세계를 부질없이 미화한다. 그러나 믿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믿음만이 사랑을 낳고 진실을 창조한다. 이 믿음은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그것뿐 아니라, 아이들 자신에게 그들의 삶을 믿게 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 그 때 잡지나 신문들에 발표한 글이 태반이어서 버리고 싶은 것도 많지만 부끄럼을 무릅쓰고 한 권으로 묶었다. 독자들의 질책을 바랄 뿐이다. 1978년 11월 이오덕
어느 여교사의 인간선언 어느 공휴일,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차가 ㅅ역에 머물었을 때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는 출입문 바깥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이런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도 가?” “그래, 환경정리 하러 간다!” 나는 놀랐다. 묻는 편의 말소리보다 대답하는 아가씨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왔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대낮에 이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태연히 “환경정리하러 간다”하고 외치는가? 이 말은 “나는 국민학교 교사다!” 하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직도 국민학교 교원이란 직업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교사가 있었던가? 더구나 이제 막 학교를 마치고 처음으로 교단에 선 듯한 여교사가 세속과 허영에 병들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목소리를 이렇게 발성하다니, 이런 일도 있었던가? “환경정리 하러 간다!” 나는 이 날 차 안에서 오랫동안 이 말을 되씹어 보았다. 교사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알이 이렇게 신기하게 내 귀에 들린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기의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자기가 수행해야 할 일에 성실하게 임한다는 것이 이토록 희한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우리의 풍속도를 펼쳐 보자. 거리에서 학생이 선생님을 만나도 못 본 척 하는 풍경이다. 이것은 교사가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학생은 또 버릇없이 되어버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 인사를 안 하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기도 하다. 길을 가다가 인사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이 교사들인데 자랑스럽지 못한 신분이 거리에서 광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고등 학생쯤 되면 이런 스승의 심정을 미리 짐작해서 멀찌기 오는 모습을 보면 옆길로 피하는데, 국민학교 조무래기들은 그게 잘 안 된다. 일부러 달려와서 바로 앞에서 길을 막아서서 꾸뻑, 하니 말이다. 그래 도시의 교사들 가운데는 “너희들 거리에서 선생님 만나면 인사 안 해도 좋다.”고 하여 타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사들한테서 자기 직업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 혹은 긍지 같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저 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수선하고 있는 신기료장수나 머리털을 깎는 이발사들한테서 그런 것을 찾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게 된 것 같다. “환경정리 하러 간다!” 그 교사가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였던가?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절로 터져 나온 밝은 목소리 그것 이었다.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아무런 주저도 없이 할 말을 한다는 태도로 대답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리어 걱정이 되었다. 그때 나와 같이 들은 또 다른 동료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속으로 “저런, 철없는 바보 선생 봐라!” 하였을 것이고, 또 그에게 먼저 말을 건 동료는 훗날 어느 자리에서 그 여교사를 만나 “넌 참 순진하기도 하구나. 그런 곳에서 환경정리 하러 간다고 예사로 고함치다니, 내 얼들이 화끈하더라.” 고 충고할 것 아닌가.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가 앞으로 다가올 주위의 차디 찬 눈길과 말없는 온갖 압력들을 이겨 내고, 고독과 좌절을 맛보면서도 기어코 순수한 정신을 지켜 나갈 것이라고. 그의 조금도 구김살 없는 듯한 밝은 목소리가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다. 나는 또 그 교사가 환경정리란 것을, 교육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교실의 벽면을 여러 가지 종이로 울긋불긋 꾸며 메우는 일로 보지 않고 진정 아이들의 참된 성장을 돕기 위한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오랜만에 맞는 공휴일을 자유로운 휴식이나 놀이로 보내는 대신에 자기의 직무와 아이들을 위해 즐겨 바친다는 것은 교육을 하는 것을 자기 삶의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환경정리 하러 간다!” “나는 국민학교 교사다!” 이 말은 국민학교 교사의 신분증을 깊숙이 감추고 다니고, 혹은 대학교수의 간판을 자랑스리 모시고 다니는 식민지적 노예근성이 청산되지 않은 사회에서 아직도 오염되지 않고 타락되지 않은 싱싱한 젊은 정신이 있음을 알리는 교사의 인간선언이라고 생각해 본다. (p.111~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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