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글짓기 교육 연구회의 회보
  • 경북 글짓기 교육 연구회에서 낸 <글짓기 회보> 2호에는 김녹촌 선생이 쓴 '백일장의 병폐'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다음 3호에는 제가 쓴 '어린이에게 배우는 글짓기'(문장관의 확립)가 실려 있고, 4호와 5호에는 역시 제가 쓴 글 '어린이의 글은 어린이의 환경과 생활의 산물이다' '문학적인 글과 실용적인 글'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겪은 일을 정직하게 자기 말로 쓰도록 하고, 보고 듣고 한 것을 솔직하게 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글을 올바르게 보는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 아이들의 글 몇 편씩을 회보에 싣고, 그 글에 대한 여러 회원들의 의견을 함께 실어서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짓기 회보>는 경북도내에 재직하고 있는 회원들뿐 아니라 다른 시나 도에 있는 교사들과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한테도 보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방의 교육자들도 이 아이들 글 합평과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회보 4호에는 서울의 이주영 씨, 의정부의 정병태 씨가 이 토론에 함께 했고, 5호에는 청주의 김홍인 씨가 쓴 글이 나옵니다. 또 이원수 선생도 '열심스런 토론이 반갑다'면서 아이들 글에 대한 의견을 5호에 보내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글짓기 회보>는 13호까지 내다가 14호부터는 아주 제목을 고쳐서 <글쓰기> 회보라고 해서, 제가 86년 2월 교직을 물러날 때까지 모두 29호가 나왔습니다. (그 뒤에는 김녹촌 선생이 회장직을 맡아 <글쓰기> 회보를 그대로 내었습니다.) 이렇게 29호가 나오는 동안 이 회보는 원고를 모으고 편집해서 만드는 일을 죄다 제가 했고, 더구나 4호부터 28호까지(25·26·27호만 다름)는 제가 모든 원고를 손으로 써서 복사 인쇄했습니다. 이 회보(4호부터) 표제 위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표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었습니다.
  • '이름 없이 정직하고 가난하게 살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인간 교육'
  • 회보의 부피야 겨우 12쪽에서 16쪽 정도였지만, 총칼로 모든 생명을 난도질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우리가 밝혀 놓은 조그만 등불은 이렇게 해서 교육을 생각하는 각 지방의 많은 분들이 관심을 모으는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 "전국 단위의 글쓰기 교육 연구 모임을 만듭시다."
  • 여러 지방에서 이런 말을 해온 것으로 압니다만, 제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에 어린이도서연구회 일을 하던 이주영 선생한테서 들은 것만은 뚜렷합니다. 이래서 각 지방의 뜻있는 교육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가 태어나도록 한 것이 경북 글짓기 교육 연구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글쓰기 교육이 적어도 교육자들의 모둠에서 참되게 논의되고, 그렇게 논의된 것이 현장에서 다시 연구 실천되고 하는 역사가 시작된 것도 이런 과정에서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