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 교육 연구회가 걸어온 길
  • 1983년 8월에 글쓰기 교육 연구회가 창립이 되었을 때 첫 회장(그때는 대표이사)으로 제가 뽑혔지만, 실제 사무는 총무인 이주영 선생이 맡았고, 회보는 출판을 담당한 주중식 선생이 만들었습니다. 회보 원고는 경북 성주에서 제가 모으고, 그 원고를 주선생이 받아서 거창에서 회보를 만들고, 회원 관리나 행사 계획 추진은 이주영 선생이 서울에서 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17년 동안 회장은 윤구병·이상석·주중식·황금성, 이렇게 여러 선생님들이 맡아서 수고해 주셨고, 실무를 맡는 분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무실도 처음에는 우편으로 연락하는 곳만 정했다가, 서울의 온누리 출판사→초원의 집→한글문화원, 이렇게 곁방살이로 여기저기 떠다녔고, 그러다가 부산(양정동)으로 옮겨가서 비로소 좀 커다란 방을 전세로 얻어 살림을 차렸고, 다시 여러 해가 지난 다음 서울 마포로 옮기고, 이제는 이곳 충북의 시골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그 동안-그러니까 지난 17년 동안 우리는 이와 같은 떠돌이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더구나 초창기 여러 해 동안에는 전두환 독재군사정권 아래서 우리는 '반정부' '불온 사상'을 가진 교사들의 모임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교사들의 집단'으로 찍혀서 언제나 교육 행정 당국의 감시 대상으로 되어 시달렸습니다. 글쓰기회 회원들은 모두가 각 시·도 교육청에서 만든 불온 교사의 명단에 올랐고, 회원들이 만드는 학급문집은 교장이나 장학사들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아이들이 정직하게 쓴, 아무것도 아닌 순진한 이야기를 쓴 글이, 교육을 부정하는 눈으로 보고 정책을 비판하도록 가르친 것이라 하여 담임 교사가 온갖 시달림을 받고 신분의 위협을 받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그래서 어이없게도 학급문집에 실리는 아이들의 글을 미리 교장 교감 선생님한테 보여서 검열을 받아야 하고, 교사들이 학급문집을 내는 일조차 장학 행정을 하는 이들은 반가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름이나 겨울에 한 번씩 우리가 모여서 연수회를 열게 되면 더욱 가관스런 일이 벌어졌지요. 교장·교감 선생들은 자기 학교 교사들이 우리 연수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연수회장에 장학사들이 몰래 끼어 들어와서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회원들은 방학 동안 연수회에 나오는 것을 비밀로 해야 했고, 우리 회에서 회원들에게 연수회의 날짜와 장소를 알리는 일조차 공개해서 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 교육 행정 당국자들은 이와같이 우리를 박해하면서 참된 교육을 할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관제 글짓기 서클에는 여러 가지로 편의를 주어서 지원을 했습니다.
  • 이런 형편에서 군사독재정권이 드디어 온 국민의 항쟁에 주춤하고 한 걸음 물러났을 때, 우리 회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교직원 노동조합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그래서 교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 글쓰기회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넓고 훤한 길, 모두가 가고 있는 그 길을 가지 않고 가시밭길을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 걸어왔습니다. 그 훤한 길은 총칼로 무장한 탱크가 닦아 놓은 길이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가시에 찔리고 돌자갈에 쓰러지고 하는 아이들과 함께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