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1-19 13:49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산처럼/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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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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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산처럼/2002 차례 책을 내면서 내가 할 말, 내가 부를 노래 제1부 지렁이, 내 형제 꾀꼬리 소리 참꽃 나라 보리매미 구름 돌을 주우며 파란 비단하늘, 새빨간 저녁노을을 보는 꿈 개 이야기 독수리와 까마귀 사람이 살아날 길
제2부 감나무 이야기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 새잎 / 감꽃 / 푸른 잎, 푸른 열매 / 단풍잎 / 감 / 홍시 / 홍시와 단풍잎 / 담은 감 / 곶감 / 감잎차 / 나무, 그 야생의 천성 / 아름다운 가지 / 사람 소리 듣고 여는 감 / 나무마다 다른 감맛 / 감나무의 수난 / 감나무는 죽어서…
제3부 감자와 고양이와 사람 이야기 권정생 선생님께 / 된장이나 김치가 먹고 싶어지는 동시 / 작가들의 직무유기, 그리고 윤동주의 <굴뚝> / 동시 <감자떡> / 윤석중 동요 <옥수수 나무> /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카쓰시카의 그분> /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나? / 글쓰기의 문제 / 매미 잡는 어른 / 무덤으로 가는 그날까지 책을 내면서 내가 할 말, 내가 부를 노래 지난 여름 어느 날 손님 몇 분이 찾아왔다. 두어 시간 이야기를 하다가 방을 나가는데, 바로 머리 위 느티나무에서 매미가 한창 기세 좋게 울고 있었다. “이제사 보리매미가 나왔구나” 했더니 “저게 매미 소린가요?” 하는 것이다. 그분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분들이었는데 매미 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우리 글쓰기회 회원 가운데 꾀꼬리 소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놀란 적이 있지만, 산딸기와 덤불딸기가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놀라지도 않았다. 사실 자연을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요즘 산에 많이 퍼져서 마을에도 내려오고 학교 운동장에까지 돌아다닌다는, 그 나무 잘 타고 밤이나 호두 같은 것을 잘 까먹는 짐승, 그것을 사람들은 모두 청설모(청살모)라고 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모두 청설모라 쓴다. 그런데 청설모란 말은 날다람쥐의 털(청서모)이란 말이고, 우리 말 사전마다 그렇게 설명해 놓기도 했다. 모두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든지 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가면 흔히 이렇게 잘못되고 만다. 그런데 날다람쥐를 설명해 놓은 말이 사전마다 다르다. 또 우리가 지금 흔하게 보는 그 날다람쥐에는, 날다람쥐에 있다는 날개막(비막)이라는 것이 없고, 활공 거리도 기껏해야 1미터쯤 되는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는 정도다. 그러니 이것이 정말 사전에 적힌 날다람쥐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떤 이들은 요즘 많이 보게 되는 그 짐승이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확인할 수 없다. 산초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사전마다 초피(조피)나무와 같은 나무라고 적어 놓았는데,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다르고, 이렇게 다른 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 결국 중국의 한자말을 쓰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산초나무가 아니고 난디나무다. 어떤 지방에서는 난대나무, 분디나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 열매를 먹기도 하고 기름으로 짜기도 하는 나무는 난디, 난대, 분디라고 하고, 열매를 양념으로 쓰는 나무는 조피, 초피라고 하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말을 써서 산초라고만 하니 그만 헷갈리고, 더구나 이런 한자말을 쓰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 나무들을 모르고 글로만 쓰니까 그만 이렇게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말의 혼란은 또 일본말이 들어와서 더해졌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서는 난디나무가 없고, 초피나무만 있다. 일본사람들은 그 초피나무를 산초(산쇼)라 한다. 이래서 우리 말이 더욱 어지럽게 된 것이다. 이런 말을 하자면 끝이 없는데,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매미나 딸기나 날다람쥐나 난디나무 같은 것은 우리 삶 속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고 만나게 되는 가장 흔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자연을 우리가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몰라도 글을 쓸 수 있겠지. 그런데 문학이라고 하는 글, 더구나 시라든가 동화와 같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자연을 몰라도 돈벌이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치를,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높은 산자락에서 늘 산을 쳐다보면서 살고 있다. 산을 바라보고 산을 생각하면 내 머리에 언제나 떠오르는 그림 같은 산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이다.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겠다. 그때 나는 어느 도시 변두리에 살았는데, 한번은 무슨 볼일로 시청에 가서,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한 방은 이층이었는데, 그 방은 남쪽으로 환하게 창이 나 있고, 창밖으로 넓은 들판이 내다보이고, 그 들판 저 끝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빙 둘러 마치 파도가 출렁이듯 산들이 겹겹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파도를 만들고 있는 산을 처음 보았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 인사만 나누고는 한참 동안 감탄하면서 그 산들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날마다 바라보면서 지내는 그 시인 친구의 직장이 한없이 부러웠고, 내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히야. 산들이 참 아름답네!” 내 말에 시인은 곧 그 산들을 찬양하는 놀라운 말을 쏟아 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저기 저 먼 산들이 파도같이 아름답네요!”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사람이 시청에 왔으면 볼일이나 볼 것이지 무슨 뚱딴지같은 산 얘기를 하나?’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다른 말을 끄집어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두어 달쯤 전이다. 어느 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있어서 ㅊ시에 갔을 때다. 그 행사에는 약 2백 명쯤 되는 문인과 지방 유지들이 모였다. 제막식이 끝났을 때 그 근처를 살펴본 나는, 그 시비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찻길 옆이어서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데 찻길 건너편의 산을 쳐다보고 놀랐다. 흙이라고는 한줌도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깎아지른 바윗덩어리로만 되어 있는 벼랑에 온통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것이다. 대체 저 나무들이 어떻게 저기서 뿌리를 내리고 있고, 어떻게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견디나? 더구나 그때가 오랫동안 가물어서 논밭의 곡식들이 마르고 타고 했는데, 그 돌산 벼랑의 나무들은 싱싱한 잎으로 꽉 우거져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과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그 산만 한참 쳐다보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나 “저 산 보세요. 참 희한하네요. 바윗돌 벼랑에 나무들이 저렇게 붙어서 싱싱하게 서 있네요!” 이렇게 말했지만, 단 한 사람도 내 말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 산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점심을 먹게 되어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 마당에 앉게 되었는데, 문인들끼리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그 자리에서도 나는 또 길 건너편 벼랑의 나무 얘기를 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내 말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오늘 거기 간 보람은 벼랑에 붙어 살고 있는 그 나무들을 본 것이었구나 싶었지만, 참으로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차 안에서 그 벼랑의 나무 이야기를 했더니 차를 운전하던 정우(장남)가 대답했다. (정우는 점심 시간에 음식점 마당에 안 가고 차 안에서 늘 하는 대로 가지고 온 감자와 고구마를 먹었던 것이다.) “저도 그걸 봤어요. 그런 벼랑에 온갖 잡목들이 그렇게 싱싱하게 우거져 있는 게 참 희한하데요. 오늘 볼 만한 건 그것밖에 없었어요.” 이러고 보니 그 시비 제막식에 모였던 2백 명 중에서 벼랑의 나무들을 본 사람은 우리 두 부자뿐이었던 것이다. 하긴 시비 제막식에 왔다면 시비만 보고 시비 이야기나 할 일이지, 산이고 벼랑이나 쳐다보고 나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예의가 아니고 용납될 수가 없겠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도 철이 없는 어린아이고, 세상 사람들과는 아주 딴 길을 가는 사람이 되었다. 산, 산에 무엇이 있나? 모든 것이 있다. 흙이 있고 돌이 있고 물이 있다. 나무가 있고 새가 울고 풀이 우거지고 벌레가 기고 온갖 짐승이 산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해와 달과 별이 있다. 사람도 거기 안겨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그 산을 끊고 자르고 뚫고 깔아뭉갠다. 사람은 산에서 살아가는 모든 목숨을 짓밟고 죽인다. 정치고 경제고 산업이고 교육이고 과학이고 기술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노릇을 하고 있다. 자연에 안겨 자연으로 살아야 할 자연의 한 부분이 그 자연을 적으로 맞서서 자연에 반역하여 자연을 죽이는 것이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이 무섭고 소름이 끼친다. 이제 앞으로 내가 할 말은 다만 죽어가는 자연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가 부를 노래는 아직도 살아남은 내 모든 형제들에 대한 슬픈 찬미가 될 수밖에 없다. 2002년 9월 이오덕
보리매미 12시 가까이 됐을 때다. 창 너머 저쪽 숲에서 보리매미 소리가 났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보리매미 소리라 옛 친구처럼 반가웠다. 처음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은 그 소리가 옛날에 울던 보리매미 소리와는 달리, 소리마디가 분명하지 않고, 영 힘이 빠진 이상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보리매미가 왜 저렇게 됐나? 보리가 패는 5월 하순에 나타나는 보리매미는 6월 10일쯤에 한창 울었다. 그런데 오늘은 6월 22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더위가 빨리 와서 모든 곡식과 푸나무가 보름에서 스무 날쯤 빨리 자라나고, 새들과 벌레들도 그렇게 나타나는데, 보리매미만은 반대로 옛날 그때보다도 스무 날쯤 더 늦게 나타났으니 참 이상하다. 《일하는 아이들》에 보리매미를 시로 쓴 작품이 두 편 있다. 그 중 하나.
일이…총 일일…총 일총일총…일총일총일총 총총총총 그러다가 오줌을 싸 놓고 옷이 젖으니 옷 입으로 뒷산으로 간다. -안동 대곡분교 3년 김순희
“오줌을 싸 놓고 옷이 젖으니…” 참 아이다운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그보다도 보리매미 소리를 정말 잘 나타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다른 한 아이가 쓴 시에는 “해자네 할머니가 / 저 매미는 울다가 세월 다 보내겠다 / 하신다 / 온 마을이 떠들썩하다”고 썼다. 장독대 옆에 앵두가 익어가는 한나절, 담 너머 살구나무 위에서, 감나무 가지에서, 풋보리 냄새 실려오는 산기슭 참나무 숲에서, 마을과 골짜기가 온통 떠들썩하게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하고 울어대는 그 싱싱한 보리매미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선하다. 이 시를 쓴 날짜가 1970년 6월 10일로 되어 있다. 앞에서 보리매미가 한창 울었던 때를 말한 내 기억이 틀림없구나 싶다. 그 옛날 그 보리매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 1999년 7월 (p.25~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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