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3-01 15:04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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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으로 가는 길/한길사/1990 차례 책머리에 제1부 무엇이 참교육인가 1. 상식과 교육 2. 꼭두각시로 길들이는 교육의 현장 3. 일하기와 교육 4. 교육이 없는 시대 5. 도시와 교육 6. 싸움, 그리고 구경꾼 7. 어른의 꿈과 어린이 꿈 8. 아이들의 거짓말과 참말 9. 교육운동의 기본 방향 10. 민주주의를 교실에 심어야 한다. 11. 민주교육으로 가는 길
제2부 참교육이 가야 할 길 1. 생명 해방의 표현교육 2.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 3. 일을 해야 사람이 된다
제3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1. 민주교육의 길 2. 아이들이 죽어가도 괜찮습니까 3. 살인교육의 질서를 바꿔야 4. 어린이를 살려야 한다 5. 아이들을 살립시다 6. 아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7. 아이들의 문제를 생각한다 8. 사람을 살리는 교육
제4부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1. 노래를 잃은 아이들 2. 교사의 비극 3. 상품이 된 교육행사 4. 벽지의 하늘 5. 겉치레 교육 6.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7. 도망쳐가는 아이들 8. 학부모들 그 극성 풍조 9. 아이들 몰라주는 문학 10. 정신교육이 없다 11. 촌 사람 도시 사람
제5부 참교육을 실천한 교사들 1. 사랑과 믿음의 교실 2. 한 교사가 치켜든 승리의 깃발 3. 교육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설 4. 우리도 이제 참교육 해야 5. 『혁명학급』을 보는 눈
책머리에 모두 5부로 엮어놓은 이 책의 제1부는,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던 굳어진 생각과 태도를 아주 깨끗이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 가져야 한다는, 교육관을 크게 옮겨 바꾸는 문제를 두고 최근 두세 해 동안에 쓴 글들이다. 제2부는 겨레교육을 다시 세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세 가지 알맹이―도덕교육․노동교육․표현교육―에 대해 쓴 글이다. 도덕교육은 겨레교육을 일으켜 세우는 기둥이라 하겠고, 삶(일하기)과 표현을 통한 교육은 식민지 교육을 깨끗이 맑히고 민주․민족․인간의 참교육을 실천하는 데 가장 효과가 있는 교육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는다. 제3부는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문제를 생각한 글들이다. 제4부는 십여 년 전에 쓴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인데, 이번에 문장을 아주 많이 고쳐서 여기 넣게 되었다. 제5부는 내가 감명 깊게 읽은 몇 권의 교육기록물에 대한 생각을 쓴 글들이다. 우리 겨레가 두 조각으로 난 땅에서 억울하고 슬픈 세월을 보낸 지도 어느덧 반 세기 가까이 되어간다. 이 기막힌 땅에서 더한층 비통한 일은 우리가 아이들을 잘못 키우고 있다는 것, 참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 겨레가 되지 못하고, 또한 아이들의 생명이 시들어 죽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 교육의 그 찌들고 찌든 병통을 진단해서 내 나름의 처방을 해보았다. 이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누구든지 비판해 주기 바란다. 만약 이것이 우리 교육을 살리는 길이라 믿는다면 모든 교육자들이 이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이 참교육의 방법을 그 잔부분에 이르기까지 다 말한 것은 아니니, 뜻있는 모든 교육자들이 현장의 실천 속에서 더욱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여 이를 기워 채우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다.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교육만이 우리가 몸바쳐 할 일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1990년 1월 이 오 덕
5. 도시와 교육 1) 넝마주의와 청소원 먼저, 최근에 읽은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한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하나는 어느 넝마 공동체에서 낸 얇은 책자에 실린, 한 주부의 짧은 목격담이다. 동네 가까운 곳에 무슨 호텔을 지으려고 땅을 깊이 파놓고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공사는 중단되었다. 비가 오니까 그곳이 깊은 못으로 되었는데, 동네 꼬마들이 전쟁놀이를 하다가 일고여덟 살쯤 된 아이 하나가 그만 빠졌다. 근처 사람들이 모두 와서 내려다보며 파출소에 신고하라느니 부모를 찾아오라느니 하여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 뿐 한 사람도 뛰어들어가 아이를 구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집게에 가구를 멘 넝마주이가 지나가다 보고 더러운 구정물 속에 뛰어들어가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껴안고 나왔다는 것. 또 하나는 어느 신문 한쪽 귀퉁이에서 겨우 몇 줄로 적힌 얘기인데, 청소원 한 분이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사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신문지에 싸둔 현금 200만원을 모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에 가서 온통 쓰레기를 뒤집어쓰면서 10여 시간 뒤진 끝에 돈뭉치를 찾아내서 돌려주었다는 것. 79년부터 청소원 일을 해온 이 분은 하루 7,500원을 받고 단간 셋방에서 일곱 식구가 사는데, 사례금 5,000원을 주는 것을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끝내 거절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 노릇(동물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자면 기본적으로(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이 꼭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입고 한 결과 자기 몸에서 나오는 온갖 불결한 폐기물들을 자기가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을 못 하면 사람이 될 수 없고, 동물도 못 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환한 진리가 이것이다. 만약 자기가 해야 할 이 일을 자기가 못 하고 남에게 맡겼을 때는, 자기 대신에 그 일을 해준 사람에게 정도에 따른 값을 치러야 할 것이고, 또한 남을 위해 힘든 일을 해준 그 사람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존경해야 할 터이다. 우리는 과연 이렇게 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서는 분뇨고 쓰레기고 무엇이든지 마구 버린다. 집 안에서는 모든 폐기물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거나 대문 밖에 내다놓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온갖 폐기물들을 쓰레기통에, 길가에, 냇물에 끝없이 버린다. 자기 눈앞에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눈앞에 그런 것이 보이면 얼굴을 찡그리고 외면한다. 그래서 그런 쓰레기며 오물들을 온갖 고생을 하면서 처리하는 사람들까지 보기 싫어한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이런 복지사회에 저런 보기 싫은 인간들이 살다니 체면이 안 선다,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도시의 구조요 도시의 정체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을 오염하는 동물이 어디 있는가? 자기가 내버린 것을 자기를 대신해서 깨끗이 없애주었다면 그 사람을 높이 보는 것이 백번도 천번도 더 마땅한 도리이겠는데, 도리어 그런 사람을 더럽다고 멀리하고, 그런 사람을 천시하다니, 이 무슨 기괴한 동물인가! 쓰레기 같은 동물! 이 추악한 동물은 자기의 새끼들까지도 그렇게 기르고 있으니 그 앞날이 뻔하다. 서로 점수를 쟁탈하는 싸움을 하게 하고, 일 안 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여,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을 멸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추악한 동물들에 의해 지구는 쓰레기로 덮여가고 모든 생물까지 멸망의 길을 재촉하고 있다. 만약 오늘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생각해 본다. 수만 군중 앞에서 진리를 외치는 지도자일까? 온갖 복지시설을 만들어 그 이름 앞에 많은 사람이 머리를 숙이게 하는 자선가일까? 결단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면 흙탕물 속에 뛰어들어가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나오는 넝마주이 같은 사람, 산더미 같은 쓰레기 속을 온종일 뒤진 끝에 잃어버린 돈을 찾아주고도 아무런 물욕을 갖지 않는 청소원 같은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라 확신한다.
2) 농촌 어린이와 도시 어린이 흔히 농촌은 교육 환경이 나쁘고 도시는 좋다고 한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다투어 어린 아이들까지 도시에 보내려고 애쓴다. 과연 도시의 교육 환경이 농촌보다 나을까? 여기 농촌 아이와 도시 아이가 쓴 글이 1편씩 있으니 이것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먼저 「거적 덮기와 걷기」란 제목으로 농촌의 6학년생이 쓴 글이다.
나는 매일 거적을 덮는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거적을 걷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거적을 걷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요 며칠 전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서 거적 덮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바람이 세게 불어서 거적을 벗기지 않았다. 나는 거적을 안 걷어도 되는 줄 알았더니 아버지께서 바람이 불어도 거적을 벗겨야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거적을 걷었다. 거적을 걷으니까 바람이 세게 불어서 거적이 날아갔다. 그래도 나는 거적을 걷었다. 다른 사람들 것은 바람 때문에 비닐이 찢어졌다. 그날 밤에 아버지와 나와 동생은 거적을 덮으러 소록골에 갔다. 우리들은 거적을 덮고 나서 다시 한번 거적이 벗겨진 데는 없는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 마을 앞에 있는 논에 가서 또 벗겨진 데가 없는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벗겨진 데는 없었다. 나는 그날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참외․수박 농사를 하는 지방의 아이들은 봄날에 비닐로 덮은 참외나 수박 묘종 위에 저녁마다 거적을 덮고, 아침마다 그것을 걷는 일을 한다. 이 글은 그런 일을 한 것을 썼다. 도시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공부할 시간도 없이 그런 일만 날마다 해야 하니 참 가엾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자란 아이들이 공부만 하면서 큰 아이들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다만 그 일이, 아이들이 하기에는 흔히 좀 너무 지나치게 많거나 힘에 겨운 것이 탈일 뿐이지. 이런 농촌 아이들의 생활에 비교하면 도시의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시 또 여기저기 학원에 끌려다니지. 삶이 없는 공부는 아이들의 건강과 지능과 지혜와 천품까지도 아주 짓밟아버리고, 그 생명을 시들어버리게 한다. 그뿐 아니고 자연이 아주 사라진 도시의 기계적인 환경은 아이들의 그 연약한 생명 위에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되어 짓누른다. 이런 글이 있다. 서울의 5학년이 쓴 「엘리베이터」란 제목의 글이다.
우리 집은 14층 맨 꼭대기에 있다. 계단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 올라가면 굼벵이마냥 반나절은 가야 하지만 언제나 나에겐 노란 문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14층까지는 금새 올라가지만, 올라가면 끝까지 올라가고, 내려가면 천길만길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도 들게 마련이다. 하여튼 오늘도 나는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학교가 파한 후였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추더니 쇠문이 확 열리면서 속 내부가 보였다. 난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눈을 꼭 감고 무의식 중으로 비상호출을 눌렀다. 잠시 후 경비 아저씨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상 정지를 눌러라!” 난 이에 닫힘을 누른 후 비상정지를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멈췄다. 제 정신이 아닌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14층으로 올라갔고, 마지막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았을 땐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난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 이 날은 내 생애 최고로 무섭고 당황했던 날이었다.
이런 기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명이 어떻게 온전히 피어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을 짓누르는 모든 기계와 조직과 제도를 반성하고 비판하지 않고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1989.6) (p.37~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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