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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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6-08-27 05:33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2002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1,599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2002
    차례
    머리말
    제 1부 󰠾 문학과 교육의 길
            ‘ 일하는 아이들’은 버려야 할 관념인가.
            1. 이 글을 쓰게 된 까닭
            2. 힘들여 읽은 글
            3.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이들이라고 했다는 말
            4. 70년대에 비로소 일하는 아이들이 있게 되었는가
            5. 밖에서 보아야 일하는 아이들이 보이는가
            6. 본 대로, 들은 대로, 한 대로 쓰게 하는 글쓰기 교육
            7. ‘전도’가 되었다는 이론
            8. 이것이 ‘관념의 재생산’인가
            9. 글쓰기 교사들의 성과를 보는 눈
            10. 문학과 교육의 바꿔치기
            11. 이런 아이가 참된 아이인가
            12. ‘역할 바꾸기’라는 우스개 이야기
            13. 맺는 말①
            14. 맺는 말②
            15. 맺는 말③
    제 2부 󰠾 어린이문학과 글쓰기, 어떻게 할까
            어린이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1. 머리말
            2. 어린이문학이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
            3. 무엇이 문제인가
            4. 보태는 말
            5. 원종찬 선생의 말
            6. 어린이문학협의회 연수 뒷이야기
            7. 어린이문학협의회와 월간 어린이문학, 그 밖의 이야기
            8. 김녹촌 성생의 의견
            9. 글쓰기 회원들의 태도
            10. 원종찬 선생의 편지와 내가 보낸 답장
            11. 맺는 말
            우리 아이들이 우리 노래를 불러야
            1. 글쓰기회 회원들에게 드립니다
            2. 세상이 허망해서
            3. 어른 노릇 싫어요
    제 3부 󰠾 겨레와 어린이를 살리는 글쓰기
            누구를 위한 번역인가
            어린이 글에 나타난 교육과 문학의 문제
    머리말
     이 책은 긴 글 두 편과 그 밖의 글 세 편으로 되어 있다. 제1부에 나오는 〈‘일하는 아이들’은 버려야 할 관념인가〉는 내가 지난 반세기 동안에 거의 한평생의 할 일로 매달려 있었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무엇인가를 대강 밝혀 놓으려고 한 것이다.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자리에 어째서 글쓰기 교육 문제를 내놓았는가? 그 까닭은, 어느 분이 내가 하여 온 그 인간교육을 논란하면서, 그것은 처음부터 관념으로 떨어져 버려 굳어진 껍질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은 그런 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 동화를, 그것도 기괴한 이야기밖에 될 수 없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혀야 한다는 주장을 논문으로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희한한 주장을 세워 놓은 글이 또 우리 문단과 지식인들에게 제법 먹혀들어 가는 형편이 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3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 아이들과 우리 겨레를 살리는 길은,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삶을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문학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2부의 〈어린이 문학, 무엇이 문제인가〉는 어린이문학협의회와 글쓰기회에서 논의하였던 문제와 내 의견을 적은 것이다. 여기서는 작가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와 문인단체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같은 제2부에 들어있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 노래를 불러야〉는 글쓰기회에서 동요를 가지고 공부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쓴 글이고, 제3부의 두 편은 번역동화의 문제, 그리고 어린이의 글쓰기와 어린이문학의 관계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글이다.
     지금 우리 어린이문학은 크고 작은 온갖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돈벌이 장사판이 벌어져서 얄팍한 세상 풍조와 어른들이 길들여 놓은 아이들의 병든 생태에 맞추는 저질 상품을 선전하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그래서 방 안에 갇혀 숨 쉴 하늘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제국주의 외세에 종속되기를 바라는 반민족의 무리들이 큰소리치고 날뛰는 위태로운 민족 현실을 바로 보는 사람도 어린이문학의 자리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이 땅의 어린이들은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재앙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문학은 지난날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서양문학과 일본문학에 딸려가고 있어서 어지럽고 어수선한 식민지문학으로 떨어졌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식민지문학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크고 뚜렷한 목표가 되어야 하고,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지금부터 내가 해야 된다고 행각하는 이 일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 첫걸음을 제대로 떼어 놓은 것 같지 않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수많은 아이들이 닭장에 갇혀 있는 비참한 동물의 신세가 되어 병들어 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참으로 시시한 일에 매달려 있다. 허깨비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우리는 아직도 모든 자리에서 상식 이하의 일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도 문학도 교육도 상식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002년 6월 이오덕
    3.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이들이라고 했다는 말
     김이구 씨의 논문에서 첫머리에 나오는 ‘아동문학이란 무엇인가’란 대문은 전체 문맥에서 볼 때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는 느끼지 않고, 다만 머리말의 구색을 갖추려고 쓴 것 같다. 그 다음 장 ‘출발점, 아동․동심의 발견’에서 동심의 문제를 이야기해 놓은 것은 그 다음부터 말하려고 하는 ‘일하는 아이들’이 걸어온 길을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란 사람이 말했다는 그 ‘전도’란 틀에 맞춰서 해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먼저 김씨가 《일하는 아이들》이나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문맥을 따라 살펴보겠다.
     세 번째 장이 되는 ‘일하는 아이와 두 개의 과정’에서 김씨는 1977년에 내가 낸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들어 말하면서 내가 쓴 평론들은 ‘해방 후 아동문학사와 아동문학비평사에 커다란 획기를 마련’했다고 하면서 내 글을 인용해 놓았다. 그것은 내가 동신천사주의를 부정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참 동심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내가 쓴 글들이 역사에 획기할 만한 일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보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내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속에서 참된 동심을 발견했다는 말은 옳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이 다음과 같다.

     이오덕은 그릇된 동심주의에 뿌리박은 기존의 부정적인 아동문학을 해체하고자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① 현실의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고, ② 동심주의 문학은 일하는 아이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일하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건설해야 하는 참된 아동문학은 ③ “무엇보다도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릴 것이다.” (밑줄은 내가 친 것임.)

     이 글을 보면 김씨가 어느 정도로 내가 발견했다는 그 참된 동심에 공감했는지, 그래서 내가 한 일이 ‘한국 아동문학의 물줄기를 크게 틀어 옮겨 놓는 계기’가 되고 ‘해방 후 아동문학사와 아동문학비평사에 커다란 획기를 마련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지, 그 진심이 좀 믿기지 않는다. 인용한 글을 좀 살펴보자. ①에서 내가 ‘현실의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라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주 거칠은 말법이고, ‘일하는 아이들’을 크게 잘못 보고 있고, 내가 한 교육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그런 말을 글로 쓴 기억이 없다. 일하면서 살아가고 자라난다는 것, 일하는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되고, 그 놀이가 일이 되고, 또 그것이 바로 학습 공부가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내 생각이다. 그러나 일과 놀이와 공부가 따로 나뉘어진 현실에서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일을 아주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아이들이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해서 자라나는 것보다는, 일을 많이 하면서 그 일에 좀 시달리기도 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그래도 좀 더 건강하고, 좀 덜 불행하다고 본다. 이런 일하는 아이들을, 그 일이 제 몸에 알맞게 되도록, 그 일을 즐겁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자각하도록, 그 일이 놀이가 되고 공부가 되도록 하는 길로 이끌어 주고 싶었던 것이 내가 하여 온 ‘일하는 아이들’의 표현교육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②에는 ‘동심주의 문학은 일하는 아이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일하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했는데, 이런 말법도 ‘일하는 아이들’에 공감과 애정을 가진 사람한테서는 나올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통 하는 말로 ‘따돌린다’ (곧 ‘소외한다’는 말)고 할 때는, 가령 예를 들자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공부 못 하는 아이를 따돌린다’든지, ‘힘이 센 아이들이 약한 아이를 따돌린다’든지, ‘도시에서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시골사람을 따돌린다’ 이렇게 말하지, ‘시험 쳐서 빵점 받은 아이가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을 따돌린다’고는 하지 않는다. ‘심신장애자가 건강한 사람들을 따돌린다’고도 하지 않고, ‘시골뜨기가 도시 사람을 따돌린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이구 씨의 말법은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 ‘동심주의 문학은 일하는 아이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했다. 시골에서 천덕꾸러기로 일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쓴 문학을 따돌렸다고? 말을 이렇게 해도 되는가? 말의 논리야 버젓하게 서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눈길로 일하는 아이들을 보는 태도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쩌다가 잘못 쓴 말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씨가 쓴 글을 따라 읽으면 김씨의 진심이 어디 있는가 의심스러운 대문이 한두 군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곧 생각나는 대문만 해도 같은 장 좀 더 뒤에서 “80년대 중반 맹렬하게 간행된, 아이들로부터 ‘받아낸’ 글들과 교사들의 갖가지 보고문은…”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 말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 가서 따질 일이 있지만 우선 여기서 말한 ‘맹렬하게’란 말은 우리가 걸어온 그 가시밭 같은 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받아낸’이란 말도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글을 억지로 받아 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나 그야말로 따돌려지고 천하게 짓밟히기만 하여 온 아이들에게 스스로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하면서 지금까지 도무지 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의 삶을 그냥 터져 나오는 말로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 아이들의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말과 글인데, 이것을 ‘맹렬하게’ ‘받아낸’ 글이라고 한다면 마치 아이들에게 그런 글을 강요해서 쓰도록 한 것같이 되어 버린다. 정말 김씨는 이렇게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다시 ③에서는 ‘무엇보다도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릴 것이다’고 한 내가 쓴 글을 인용해 놓았다. 여기서 이 인용된 부분의 글에 대해서, 그 글 〈아동문학과 서민성〉 전체를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내가 좀 덧붙여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렇게 인용된 부분은 〈아동문학과 서민성〉이란 논문의 맨 마지막 결론 자리의 끝에 가서 ‘이제 아동문학이 온 겨레의 재산이 되도록 하기 위해, 지금까지 진실한 세계를 창조하여 온 작가들이 그 작품들에서 모색하고 구현하려던 것을 정리하여 들어 봄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혀 보려고 한다’고 하여 열 가지를 들어 놓았는데, 그 중 첫머리에 들어 놓은 한 가지만을 이렇게 김씨가 인용한 것이다. 참고로 그 열 가지를 다음에 옮겨 본다.
     ‘첫째, 무엇보다도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릴 것이다.
     둘째, 불행한 아이들에 대해서 단지 그들을 글감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마음으로 진정 그 불행을 해결해 주고 혹은 덜어 주어야겠다는 사람다운 사랑으로 그들을 그려야 한다.
     셋째, 짓밟히고 학대받는 모든 생명에 대한 동정은 서민들의 것이다.
     넷째,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민족 감정의 표현.
     다섯째, 압제에 버티는 정신과 평화주의 사상.
     여섯째, 세련되고 열리하고 약삭빠른 아이보다 촌스럽고 어리석은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는 것은 더욱 사람답고 우리 겨레다운 태도가.
     일곱째, 모든 사람다운 생각과 감정을 옹호해야 한다.
     여덟째, 그 밖에 서민들 특유의 생활과 삼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홉째, 앞에 열거한 주제들을 작품으로 잘 형상해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열째,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쉽고 바른 우리말로 쓴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책에 나온 원문에서, 어렵거나 우리 말법에 맞지 않는 낱말을 몇 군데 쉬운 우리말로 고쳤음.)
     그다지 잘 정돈된 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린이문학에 대한 내 생각을 여기서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김씨는 이 열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가려내어 자신이 펼쳐 보이려고 하는 논리 속에 인용하였다. 물론 그 부분이 맨 첫째로 나와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터이니 그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현실의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고…’ 하면서 자꾸 나는 어떤 편협하게 굳어진 관념을 가진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쉽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들어 놓은 그 인용문 끝에 물음표를 달아서 그 아래에 풀어 둔 말이 또 잘못되었다. 그 풀이가 이렇게 되어 있다.

     〈아동문학과 서민성〉《시정신과 유희정신》138쪽. 이오덕은 마해송․이주홍․이원수․권정생․이현주․권태응․신현득 등에 대해서는 민족과 아동을 주체로 한 긍정적인 아동문학으로 적극 평가하고 있다.

     나는 그 〈아동문학과 서민성〉이란 글에서 마해송․이주홍․이원수․권정생․이현주, 이 다섯 분을 ‘서민들의 세계’에서 ‘진실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고 한 작가라 하여 그 작품 세계를 말했다. 그런데 권태응․신현득 두 사람은 그 글 어디에도 이름조차 들지 않았다. 동요시인 권태응은 그 무렵 그의 작품이 아주 일부밖에는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나는 그를 깊이 알지 못했고, 신현득은 같은 책 다른 자리(〈부정의 동시〉)에서 아주 달리 비판해 놓았다. 그런데 어째서 김씨가 이렇게 내 글을 오해하도록 풀이를 달아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남의 글을 이렇게 제멋대로 소개하면서 잘못 알게 되도록 하는 그 경솔하고 무책임한 글쓰기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이’라는 좀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쓰거나 작품을 논하거나 교육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 작품을 들어서 말해야 할 차례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이야기가 되어 나올 것이기에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p.24~p.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