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12-08 18:02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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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바로쓰기1/한길사/1992 차례 □고침판을 내면서 □머릿말 □들어가는 말 제1장 중국글자말에서 풀려나기 1. 우리 글자로 썼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알기 힘드는 중국글자말 2.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아듣기 힘드는 중국글자말 3. 문자쓰는 말과 글에서 벗어나야 4. 공연히 어렵게 쓰는 중국글자말 5. 많이 쓰는 중국글자말도 더 정다운 우리 말로 6. 우리 말을 파괴하는 중국글자말투 7. 틀리게 쓰는 중국글자말 (1) ‘중국글자말+한다’로 쓰는 경우 기초한다․기반한다․근거한다․위치한다․웅변한다․결실한다․ 이름한다․기능한다․자유한다․가열차다 (2) 겹말 (3) ‘일절’인가 ‘일체’인가? (4) 잘못쓰는 하임움직씨 ‘―시킨다’ 제 2장 우리 말을 병들게 하는 일본말 1. 우리 말을 파괴하는 일본말 일본글 2. <진다><된다><되어진다><불린다> 3. ―에 있어서 4. <의> 5. <와의>(과의) 6. <에의> 7. <로의>(으로의) 8. <에서의> 9. <로서의>(으로서의) 10. <로부터의>(으로부터의) 11. <에로의>그밖 12. <에게서> 13. 그 밖에 필요없이 겹치는 토 14. <보다<>(토씨를 어찌씨로 잘못 쓰는 말) 15. <…에 다름 아니다>와<주목에 값한다> 16. <의하여> 17. <속속><지분><애매하다> 18. <수순><신병><인도><입장> 19. <미소><미소짓다> 20. 그 밖의 일본말들 축제 납득 옥내(옥외) 세면 천정 하치장 상담 거래선 승합차 수속 취입 조기청소 수취인 입구 할증금 치환 일응 담합 21. <그녀>에 대하여 제 3장 서양말 홍수가 졌다 1. 이 땅에서는 서양사람들도 우리 말을 해야 한다 2. 영어문법 따라 쓰는 ‘―었었다’ 3. 쓰지 말아야 할 말 4. 들온말 적기 5. 잡지 이름, 상품 이름 제 4장 말의 민주화(1) 1. 이야기글의 역사 2. 벼슬아치의 말과 글 3. 땅 이름, 마을 이름 4. 일제 말, 군대 말 5. 강론 말 6. 방송 말 7. 글말 8. 사람 가리킴 말 9. 높임말 10. 준말 제 5장 말의 민주화(2) 1. 말과 생각의 관계(질문과 대답) 2. 잘못 쓰는 말 3. 아름답지 못한 말 4. 농민의 말 5. 일제시대․북한․중국연변의 말 제 6장 글쓰기와 우리 말 살리기 1. 아이들의 글쓰기와 어른들의 글쓰기 2. 농민문화 창조를 위한 글쓰기 3. 우리 말 속의 일본말 4. 우리 말, 어떻게 살릴까
□고침판을 내면서 이 책의 초판이 나간 지 두 해도 몇 달이 더 지난 지금에야 고침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고친 부분을 크게 나누면 네 가지가 됩니다. 첫째는 책을 읽어준 분들이 지적한 것인데, 잘못된 낱말이나 맞춤법, 틀린 글자들입니다. 몇 군제 안되지만 가르쳐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둘째는 잘못 쓴 말들을 쉬운 우리 말로 바꿔놓은 자리에서 가끔 더 알맞겠다 싶은 말로 고치거나 보충하였고, 필요가 없는 글점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셋때는 그동안 저 자신이 잘못 썼다고 깨달은 말과 좀더 깨끗한 우리 말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말들을 바로잡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는 자주 나오기에 여기 들어봅니다.
◇한자→중국글자 ◇한문→중국글 ◇특히→더구나 ◇즉→곧 ◇일하다→일한다.
이 가운데서 ‘한자’를 ‘중국글자’라고 쓰게 된 까닭은, ‘한자’라 써놓으니 ‘한 자, 두 자’할 때의 ‘한 자’와 구별이 안도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글자’라고 쓰다가 차라리 아주 ‘중국글자’로 쓰는 것이 좋고 더 바른 말이 되겠다 싶어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국글’이 되고, ‘한자말’은 ‘중국글자말’이 되었습니다. ‘일하다’를 ‘일한다’로 고친 까닭은 이러합니다. 사전이나 문법책에는 으뜸꼴이라 하여 ‘일하다’‘걸어가다’ ‘밥먹다’로 나오지만, 우리 말이 원래 이렇게는 안 쓰입니다. 그림씨(형용사)는 ‘깨끗하다’ ‘기쁘다’로 쓰지만 움직씨(동사)는 어디까지나 ‘일한다, 일했다’ ‘간다, 갔다’이렇게 말합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그 무엇이 어느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그 때가 나타나야 합니다. 때가 없는 움직임은 있을 수 없지요. 우리 말은 이와 같이 사실에 잘 맞고 이치에 맞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길제로 쓰고 있는 살아 있는 말을 따르는 것이 옳겠다고 깨달아 이와 같이 바로잡은 것입니다. 넷째는 제가 쓴 문장을 고친 것인데, 이것은 아주 많이 고쳤습니다. 이번에 고침판을 내려고 이 책을 읽어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글을 바로 쓰자고 한 책인데 정작 내가 쓴 글은 이렇게 허술하게 썼으니 말입니다. 부끄러운 느낌과 함께 그동안 읽어준 분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정신을 들여 읽으면서 보태고 깎고 고치고 하여 글이 제대로 읽힐 수 있도록 다듬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잘못된 곳이 있겠지요. 부디 앞으로도 읽는 분들이 지적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책이지만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격려와 함께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 책이 우리 말을 살리는 일에 대한 관심을 크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읽어준 여러분들의 뜨거운 우리 말 사랑, 겨레 사랑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정말 이제는 겨레말 살리는 일을 서로 일깨우고 서로 배우면서 하고, 스스로 살펴서 자기혁명을 하는 마음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온 것이지요. 말을 살리는 일이 바로 목숨을 살리는 일임을 모두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을 겨레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1992. 3 이오덕
21. <그녀>에 대하여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소설가들이 소설에 나오는 여자를 삼인칭으로 가리킬 때 <그녀>라고 쓴다. 나는 최근까지 이 <그녀>에 대해 좀 못마땅하다는 느낌뿐이었지 확실한 의견을 가지지는 않았다. 내가 못마땅히 여긴 것은,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 ‘그녀’로 해야 할까? ‘그녀’는 일본말 ‘가노조’(彼女)를 그대로 옮긴 말이다. 그래서 우리 소설은 우리 말법을 따라 써야 하겠는데 너무 쉽게 남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한 외국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가운데 크게 깨달았다. 그 외국 사람이 우리 말로 더듬거리며 말하는 가운데 바로 ‘그녀’란 말이 나왔던 것이다. “어제 그녀를 만났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가, 이건 우리 말이 아니구나, 우리 말이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번개같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지금 ‘그녀’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소설에만 쓰는 말이지, 실제 입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 말은 ‘그 사람’이라든지 ‘그 여자분’이라고 합니다.” 내 말에 그 외국 사람은 상당히 놀라는 듯했다. 실제로 쓰지도 않는 말을 소설가들이 글로 쓴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다른 어떤 글보다도 소설은 입말에 가까운 말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삼인칭의 말은 실제로 쓰는 말이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는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가 뭔가! 이건 실제로 대가 들어 보니 남자를 욕할 때 ‘그놈’하듯이 여자를 모욕할 때 나오는 말 ‘그년’과 구별하기 힘들다 싶었다. 그래서 이 말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설에서 쓰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그녀>에 대해 또 한번 느낀 바를 적어 본다. 다음은 『신협회보』(89.6.1)에 나온 「조그만 삶 속의 큰 신협인」이란 제목의 기사 앞 절반을 옮긴 글이다.
이름 탓인지 몰라도 그녀는 유난히 키가 작다. 키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칠십 평생이 그렇게 작았을지 모른다. 그녀가 신협 사무실에 들어서며 하는 첫 마디는 언제나 “고생허슈”리다. 간혹 새로 들어온 직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으면 “고생혀”라고 다시 강조한다. 그 인사말이 나이 드신 분의 예사 인사려니 하고 넘겨 버리기에는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쌓인 생(生)의 깊이가 너무 깊다.
이 글 안에는 ‘그녀’란 말이 세 번 나온다. 그리고 한 곳에는 ‘그’라고 나온다. 아마 ‘그녀’란 말에 익숙하지 못했던 기자가 이 글을 쓰다가 저도 몰래(자연스럽게) ‘그’라고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누구든지 이 글만 읽어서는 여기 나오는 ‘그녀’가 그저 보통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글에 나오는 ‘그녀’와 별로 다름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문 한가운데에는 바로 이 기사의 주인공인 ‘이자근’씨(성우신협 조합원)의 얼굴 사진이 나와 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이 기사를 읽으니, 여기 나온 ‘그녀’란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 바로 느끼게 된다. 이자근 씨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농촌에서 평생을 땅만 파면서 살아온 할머니다. 그것은 이 기사문을 읽지 않고 사진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이런 농사꾼 할머니를 ‘그녀’라고 불러야 이 글이 씌어질까? 아무래도 나는 ‘그녀’란 말에 걸린다. 이건 우리 말이 아니고 우리 말이 될 수도 없다는 생각을 아주 또렷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고향에 다녀왔다.(‘연변조선족소설선’ 책이름) ◇그녀는 어깨 나란히 걸어가는 생금이와 희숙이의 뒤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위의 작 품에서) 2차대전이 끝난 뒤부터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남의 나라말(일본어와 영어)의 오염에서 우리 말을 잘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중국 연변지방의 작가들도 이제는 ‘그녀’를 예사로 쓰게 된 것 같다. 이 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p.213~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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