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6-26 00:56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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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교육 이오덕
학교 운동장 구석에 있던 감나무가 사무실 앞으로 옮겨져 왔다. 그 감나무가 겨우 살아 붙을 만하니 이번에는 새 교장선생이 부임하여 다시 운동장 서쪽 둑으로 옮겨 심어지고, 그해 여름 잎이 조금 살아나는가 싶더니 결국 말라 죽어 버렸다. 교사 뒤편에 서 있던 정정한 플라타너스 몇 그루가 아깝게도 어느 해 겨울 죄다 베어졌다, 그 쓰러진 나무들은 필경 교장 숙사의 화목으로 다 처리됐을 게다. 학교의 집은 돈만 있으면 한두 달 만에도 지을 수 있지만 나무는 그럴 수 없다. 생각 있는 분들이 먼 날을 위해 정성들여 심어두고 오랜 세월을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키워온 보람들이 어느 한 사람의 독단과 취미와 기분에 따라 무참히 결말이 되고 마는 것이 오늘날 슬픈 이 땅의 현실이다. 민주교육을 하는 학원에서 그럴 수가 있는가. 왜 많은 교사들이 교장 처사를 그냥 내버려두느냐? 잘 보좌를 못하는 것이라고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늘 교육계의 타락된 풍습을 만들어낸 메커니즘을 모르고 있으니, 다음 얘기를 들어보라. 교무실 벽에 걸려 있는 칠판에 아침마다 아이들 출석 상황을 적어 넣게 되어 있는데,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그 숫자를 모두 한자로 고쳐놓았다. 칸이 위 아래로 길어서 아라비아 숫자를 쓰기에 불편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쳤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선생님들이 숫자를 써 넣는데 지금까지 써오던 아라비아 숫자를 버리고 모두 한자로 써 넣은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중 젊은 선생님 한 분에게 물었다. “왜, 쓰기도 불편한데 하필 한자로 써 넣어요?” “교장선생님이 한자로 적었으니 따라 해야지요.” 나는 그 대답을 듣자 전임지 학교에서 쓰던 말이 생각났다. 그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모두 ‘학생’이란 말을 쓸 줄 모르고 일제 때 쓰던 '생도’로만 쓰고 있었다. 청소보다 ‘소제’를 많이 쓰고, ‘유리창’이란 말도 들을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창경’으로 쓰고 있었는데, 처음엔 좀 이상하다 싶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교장 영감님의 용어가 꼭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 일거일동이 바로 수십 명의 교원을 통해 수천 명 어린이의 피와 살이 되는 학교 교육의 책임자가 자기 나라 말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성의하다는 것은 단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죄악을 범하는 결과가 된다. 그들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극히 관료적이고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교육관으로 말없이 서 있는 나무에서 뛰어다니는 어린 생명까지 제멋대로 비틀고 자르고 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또 그리고 수많은 젊은 교사들 역시 아첨이 아니면 비굴이요. 무기력이요. 맹종이요. 이기타산 요령주의로 제 몸만 지켜 살아가고 있다면 나라의 장래가 심히 우려된다. 대관절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면 그 안에 서 있는 나무들은 거의 모두가 부자연스럽고 비뚤어지면서 커가는 것 같은 것은 지나친 나의 기분일까? 울타리의 측백은 해마다 깨끗이 모가지와 허리가 잘라지고, 화단의 온갖 나무들이 어떤 것은 세모로, 어떤 것은 동그랗게, 또 어떤 것은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진다. 포플러도 옆으로 뻗어나라고 둥치가 중간에서 뭉텅 잘리는 수가 흔하다. 등나무는 몇 십 바퀴나 뒤틀려 꼬여진 뒤라야 시렁에 올라가는 것을 용서한다. 수양버들도 인간들의 이발하는 풍습을 배워야 한다. 화분에 심어진 나무나 풀도 제대로 자연스럽게 커갈 수 없다. 만일 굳이 개성을 고집하는 것이 있으면 그런 것은 나무든지 풀이든지 학교라는 곳에서 추방되게 마련이다. 생명을 키워가고, 그것이 커가는 이치는 나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포플러는 포플러같이 키워야하고 소나무는 소나무로 키워야 한다. 어린 생명을 천성 그대로 죽죽 뻗어나게 하라. 개성이 살아나게 하라. 가위질도 하지 말고 제멋대로 호령하여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지 말라. 한 사람의 명령으로 인간을 기계화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 교육은 생명 성장을 방해하는 교육, 생명을 말살해 버리는 교육이 된 것 아닌가. 선생님이라고 어른이라고 답례도 안 하면서 어린이들에게는 인사를 하라, 예의를 지키라고 강요하고, 선생님들 자신은 아침마다 교실에서 하는 첫인사가 돈 가져오라는 말이다. 콩나물시루 속에서 시험 준비로 들볶아 그 품성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허망한 학교 이름이나 내기 위해 각종 경기대회, 전시회, 백일장, 무슨무슨 대회 등 행사로 어린이들을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그리하여 타오르는 생명의 싹을 짓밟아 버리고, 가위로 싹싹 잘라버리는 그런 맹랑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을 생명으로 키우지 않고 스위치 하나로 이리 돌고 저리 돌아가는 기계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기분으로 좌우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1965.7)(거꾸로 사는 재미, 산처럼, 2005)
*이 글은 선생님이 처음 교감으로 발령을 받아서 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서부초등학교에서 근무하실 때 쓰신 글입니다. 아마 교육잡지에 냈던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버릴 수 있는‘의’자만 버리고, 두 번째 문단 첫 문장에서 ‘아동’이라고 쓴 것을 ‘아이’라고 바꾸고 그대로 옮겼습니다. 교장이 교실 뒤에 있던 플라타너스를 베어다 자기 집에 불을 때고, 쓸데없이 나무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 심어서 죽게 하고, 아라비라 숫자로 쓰던 걸 한자로 쓰게 하고, 그런 모습을 보고 교사들이 말리기는커녕 무조건 따라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쓴 글인데, 선생님은 이 학교에서 교장과 이렇게 반목하다가 2년 반도 못하고 교감직을 반납하고 학교를 옮겼습니다. 작년에 이안 서부초등학교를 찾아 답사를 갔을 때 운동장 앞에 서 있던 몇 십 년 된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기억이 납니다. 감나무를 옮겨 심어 죽게 했다는 서쪽 둑도 떠오릅니다. 교육잡지에 실린 이 글을 읽은 그 교장이 더 이상 마음대로 나무를 베지는 못했겠지만 ‘만일 굳이 개성을 고집하는 것이 있으면 그런 것은 나무든지 풀이든지 학교라는 곳에서 추방되게 마련이다’고 쓴 글처럼 이런 글을 쓴 선생님에 대한 교장이나 동료 교사들 미움이 결국 선생님을 잘라내 추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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