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6-26 01:03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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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말 이오덕 그럭저럭 40년 가까운 세월을 아이들과 살아왔으니, 이제는 한 차례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더러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백발이 되도록 교육에 몸을 바쳤다면서 고마워하는데, 나 같은 나이가 된 교직자들에게 으레 하는 인사말 같은 것이야 예사로 듣는 것이지만, 이따금 진정 거룩한 교육자로 잘못 보는 경우가 있어 정말 부끄럽고 난처하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교단에서 무엇을 하였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무엇을 하였는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죄를 지었을 뿐이다. 내가 여기서 할 말이 있다면 죄 지은 얘기를 털어놓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대강 말해 보자. 나는 일본 제국 말기에 교원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내 천직이라고 깨달은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교단에 서보니 참 힘들고 괴로웠다. 일제의 살벌한 군대식 교육은 체질적으로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다른 참교육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만한 나대로의 교육관이나 교육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잃고 위축된 나날을 괴로워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우리 말로 한마디 다정하게 얘기해 줄 줄 몰랐고, 수업료와 비행기 헌납금 같은 것이나 독촉하면서, 날마다 관솔을 따러 산으로 끌고 다니고, 냇가에서 잔디를 파고 돌을 주워 나르는 개간이나 시켰다. 1년 남짓한 그 동안에 나는 우리 민족의 아이들을 일본 제국의 아이들로 훈련하는 일에 충실히 협력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잠시 꿈같은 날을 보냈지만, 일제의 망령은 모든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동 중심이니, 민주 교육이니 하는 것은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한층 악화시킨 것이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온갖 금품 징수 사무였다. 해방 직후 내가 근무하던 ㅂ시 어느 학교에서 달마다 아이들로부터 걷어낸 돈의 종류가 열 가지도 훨씬 더 넘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돈 아닌 물건을 걷어 모으는 일이 또 그만큼 많았다. 이런 짓을 용납하며 감행해 온 사람이 교육자는 무슨 교육자란 말인가? 그 당시 교육계에서 모범 교사가 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돈’ 잘 것어내는 일이고, 둘째는 ‘청소’ 깨끗이 하는 것, 셋째는 ‘환경 정리’ 잘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에서 무사히 월급쟁이 노릇을 하여왔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군정이 물러가고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도 아이들한테서 돈 걷어내는 일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 한층 심해지기도 했다. 5.16을 맞아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란 사람들이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가면 출석을 부르기도 전에 “돈 가져오너라”는 소리를 누구나 인사말처럼 했다. 여러 가지 돈을 효과적으로 걷어내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 결과 대개 어느 학교든지 담임교사가 80퍼센트 정도를 의무적으로 걷어내게 되었다. 그러면 담임교사의 월급을 대납하지 않기 위해, 또는 80페센트를 초과한 징수액을 자기의 수입으로 잡기 위해 아이들을 가혹하게 독촉했다. 때로는 학교까지 온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이런 혹독한 독촉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는 가난한 아이들도 가끔 있었다. 이런 짓을 한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살아온 것이다. 1950년대에 내가 어느 농촌의 사랍학교에 있었을 때, 가난한 학생들에게 수업료 독촉을 하면서, “너희들도 어렵갰지만 우리도 살아야 한다”고 뻔뻔스럽게 말하여 아이들을 울렸던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는 그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비 한 푼 보태주지 않고 말이다. 이 나라의 교육사를 쓰는 학자들이 지난날의 교육을 어떤 찬란한 말씀으로 적어둘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남들이야 어떻게 교육을 보고 자기를 평가할 것인지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나 자신이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는 것이다. 자유당은 교육자들을 사람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하지 않고, 세금 징수 사무원으로 전락시켜 놓았다. 그리고는 온갖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장부를 만들게 하고, 보고를 하게 하고, 행정 방침들을 외게까지했다. 나도 남들과 같이 욀 수도 없는 온갖 장학 방침과 유실 수종 열세 가지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넣고 다녔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돈 걷는 일만은 천만다행히도 거의 없어졌지만, 이제 교육은 하나의 상품으로 되고 말았다. 빈 내용을 겉치레로 선전하기에 학교마다 경쟁이 되었고, 아이들은 서로 점수를 많이 따려고 하는 비참한 경쟁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교육 행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교육을 그 세부 실천에 이르기까지 간섭함으로써 학교 교육은 온전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어느 학교 없이 교육 목표는 세우지만 장학 방침을 구현하여 그 실적을 숫자로 보고해야 하므로 교육 목표는 형식에 그치거나 그 목표조차 장학 방침을 열거하는 꼴이 되어, 천편일률의 교육이 강행되었다. 교사들은 다만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이행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또한 교사의 지시 명령에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그 가르치는 사람을 지시하고 관리하는 자리에 서게 된 나는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교육행정학 같은 데는 어떻게 씌어 있는지 모르지만, 현재 우리 나라의 학교 현장에서는 교장과 교사들의 사이가 부리고 부려지는 관계로 성립되어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선생님들을 잘 부려먹는 교장이 수완이 있고 능력이 우수한 행정가로 인정받는다. 이런 현실에서 올바른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선생님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들의 양심에서 우러나는 교육의 창조적 실천을 기대해야 하겠는데, 그것이 안된다. 또한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온갖 행정적인 공해의 물줄기를 나는 그저 고통스러운 방관자로 보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뛰어들어가 더욱 심하고 철저하게 그 공해를 늘어나게 해야 할 몸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해의 물결이 아이들에게까지 가지 않도록, 내가 못 막은 그것을 선생님들이 막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될 수 없어 아이들은 오늘도 탁류의 소용돌이 속에 떠내려가고 있다. 며칠 전 어느 아이의 일기에세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 “나는 일기 쓰기가 지긋지긋하게 싫다. 그래도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지금까지 이것만은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거의 확신을 가지고 권장한 일기 쓰기가 아이들에게는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또, 어느 아이의 글에는 “교장선생님은 글짓기를 많이 시키신다. 글짓기가 제일 싫다”고 했다. 내가 여기 와서 석 달이 지나는 동안 꼭 두차례 글을 쓰도록 했다. 공문 지시를 그대로 이행한다면 정말 아이들이 쓰기 거북스러운 글을 다섯 차례도 더 썼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인간스러운 느낌과 생각을 깨우치기위해서 글을 쓰도록 했다. 그것이 이런 결과로 되었다. 교사의 참된 깨달음에세 출발하지 않는 교육은 어떤 것이라도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교사들을 그런 자각으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 나는, 그러기에 그들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통감한다. 내가 진작부터 관심을 가져온 것이 이 글짓기 교육이다. 글짓기 교육은 비인간적인 교육 상황에세 입은 독소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해독의 교육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장이란 직책은 이런 교육을 실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을 선생님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는데 선생님들은 글짓기를 문학으로 알고 있고, 교장선생님이 문학가라서 ‘개인적인 취미’를 강요하는 줄 안다. 공문으로도 수없이 쓰도록 지시하고 있는 글짓기를 어쩌다 교장이 독창적으로 (아이들 편에세 쓰고 싶은 것을 쓰도록)권하면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반발을 하는 이 상황은,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얼마나 비참한 획일성에 길들여져 있는가를 잘 말해 준다. 글짓기로 실천하려고 하는 인간 교육의 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또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글을 성급히 조작해 내어서 상을 타고 이름을 냄으로써 교육의 성과를 과시하려는 이들이 있어 아이들에게 잘못된 말재주를 가르치는 짓이 보편화되고 있는 일이다. 아이들의 인간적 느낌과 생각의 싹을 짓밟아 버리는 한갓 우스개 말장난 같은 것을 쓰게 하는 이 사이비 교육을 비판하고 참인간의 마음을 키워가는 교육이 자리잡도록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나에게 그럴 자유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하는 일에 부당한 간섭을 안 받아도 되는 산골 분교장 같은 곳을 찾아가 아이들과 같이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내가 지은 죄를 얼마쯤이라도 갚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힘든 변소 청소를 아이들에게만 시킬 것이 아니라, 다만 일주일에 한 번쯤이라도 내 손으로 해 보이는 성실성쯤은 있어야겠다고 깨닫기는 했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 점심시간에는 교실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얘기라도 해야지, 내가 먹고 있는 보리밥을 보여주기라도 해야지, 하면서 그것조차 거의 못하고 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훈련시킨 교관이었고, 돈을 징수하는 세금쟁이였다. 나는 아이들의 그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재질과 개성을 뻗쳐줄 줄 모르고 획일화의 몽둥이를 휘둘러 그들을 똑같은 형태로 두들겨 맞추어온 폭군이었다. 서로 남을 해치는 비참한 경쟁을 강요하는 깡패였다. 선거운동을 하였던 위선자였다. 이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소리를 해서 눈을 끌고, 그래서 나를 한층 정직한 사람으로 돋보이게 하자는 심산으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다들 나를 죄인으로 봐 달라는 말이다. 앞으로 나는 이 죄를 얼마쯤이라도 씻기 위해 있는 힘을 다 할 것이다.(길을 밝히는 사람들, 김봉군 엮음, 한샘, 1982. 405쪽)
* 이 글은 1982년 당시 성신여대 김봉군 교수가 ‘교육의 길·스승의 길’이라는 주제로 전국교사들을 대상으로 글을 받아 엮은 책에 실렸던 글입니다. 그때 글을 부탁할 초등학교 교사를 교섭하고 글을 모으는 일을 제가 담당을 했는데, 주로 이오덕 선생님께 여쭈어서 말씀하신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선생님들이 잘 한 일이나 열심히 한 일을 써서 보내주셨는데, 이오덕 선생님하고 이호철 선생님은 잘못한 일을 써서 보내주셨습니다. 편집위원들이 모두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으면서 놀라고 한 편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말씀을 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려울 때마다 이 글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힘이 되어 준 글입니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 동안 교사로서 지은 죄가 많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써 주신 이 글 때문에 그나마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보다 조금은 덜 슬픈 교사, 교사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기쁨을 가끔 누리면서 살아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글은 ‘거꾸로 사는 재미/산처럼’에 옮겨 실은 글을 옮겼습니다. 1983년 범우사에서 낸 ‘거꾸로 사는 재미‘에 옮길 때 잘못 쓴 문장을 조금 손질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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