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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6-02-09 13:57
    1993년 10월 회보에 실린 <민진이 일기와 새롬이 일기>
     글쓴이 : 김형성
    조회 : 4,749  
            1993년 10월 회보에 실린 <민진이 일기와 새롬이 일기>에서 '기분 좋은 날'이 샘터에서 낸 <시들시들한 글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글쓰기 지도1>(이가령)에 실렸습니다.
    지도하신 선생님이나 글을 쓰신 이새롬 님이 보시면 사무실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58호 (1993년 10월)
    [도시 아이들의 글과 삶]
    민진이 일기와 새롬이 일기 
    이성인 
    연구위원 

    1. 도시 아이들에게 삶이 있는가

    농촌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도시 학교에 왔을 때, 첫 느낌은 숨막힘이었다. 전교생이 200명쯤되는 농촌 학교에서는 담임이 아니라도 아이들을 대개 알 수 있었다. 도시 학교에서는 우리 반 아이들밖에 알 수 없었고, 같은 학교 선생님들과도 4년 동안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도시 아이들이 뛰놀기에 운동장은 턱없이 좁았고, 길거리는 차들로 만원이었다. 가로수 잎새는 자동차 매연으로 제 빛을 잃고 있었다. 일년 내내 뿌연 하늘 빛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도시 아이들에게는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시들의 감동이 전달되지 않았다. 도시 아이들은 농촌 아이들의 글,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시는 생명의 젖줄인 자연을 잃은 곳이다. 그런 도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은 어머니인 자연을 만날 수 없는 고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와 학원과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가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글 속에는 생활다운 생활이 없다. 그런 생활 속에서 글다운 글이 씌어질수 있을까. 도시 아이들의 글에는 계절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이오덕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 도시 아이들의 글에는 계절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도시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자연과 삶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도시 아이들의 삶을 가꾸기 위해 글쓰기 교육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두 아이의 일기를 견주어 읽으며, 몇 차례에 걸쳐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한 아이는 경기도 안양시에서 사는 오민진이라는 아이로 1991년 산하출판사에서 <너에게만 보여 줄게>라는 일기글모음을 펴 냈다. 이 책에는 3, 4학년 2년치 일기가 실려 있다. 책 표지에 소개한 내용을 보면, 민진이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오래곤 주의 어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이때 우리 나라 말과 글을 잊지 않으려고 꼬박꼬박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귀국 후 지금까지 계속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 아이는 서울에서 사는 이새롬이라는 아이다. 새롬이는 내가 어느 사회교육 단체 글쓰기 교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글쓰기를 가르칠 때 만난 아이다. 그때 새롬이는 3학년이었는데 한학기 동안 가르쳤다. 올해 초 새롬이네 집에 연락을 해서 그동안 쓴 일기장을 빌려 읽었다. 2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또박또박 정성스레 쓴 스물 한 권 되는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도시 아이라도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기 삶을 가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새롬이 일기를 다 읽고 나서 새롬이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버지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라는 데, 집에서 특별히 글쓰기를 지도한 일은 없다고 한다.
    (미리 밝혀 두고 싶은데, 이 글의 목적은 어떤 아이의 글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데 있지 않고, 올바른 교육의 방향과 방법을 찾아 보려는 데 있다. 어떤 아이의 글을 비판할 때, 그 아이의 이름이나 학교를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책으로 출판된 일기이기에 여기서는 실제 이름을 그대로 보이기로 한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2. 일기는 느낌과 생각으로 써야 한다는 가르침

    일기는 느낌과 생각으로 써야 좋은 글이 되고, 사실을 위주로 쓰면 좋지 않은 글이라는 가르침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글쓰기 연수 때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느낌과 생각으로 쓴 ‘좋은 글’의 본보기가 바로 오민진의 일기모음 <너에게만 보여줄게>이다. 이 아이가 어떤 태도로 글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안네의 일기
    3학년 오민진
    오늘 나는 고모와 고모부가 10월 3일에 사 주신 책을 읽었다. <안네의 일기>다.
    나는 그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지만 오늘은 시간을 내어 반쯤 읽었다.
    안네 언니는 참 불쌍하다. 왜냐하면 안네 언니는 다락방에서 살았고 15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언니는 일기를 느낌이나 생각으로 쓰니까 재미있었다.
    나도 다음에 내가 일기를 쓸 때 느낌이나 생각으로 쓰겠다. (89. 10. 23. 월)

    기쁜꿈
    3학년 오민진
    어젯밤 나는 나의 꿈에서 작가가 되고 있었다.
    나는 작가가 되는 일이 쉬운 일인 줄 알았지만 내 꿈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작가가 되려고 책도 많이 읽고 글씨도 많이 쓴다.
    나는 동화책을 읽는다. 왜냐 하면 소설책은 나의 나이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들다. 나는 지금 느낌이나 생각으로 썼으며 다음에도 느낌이나 생각으로 많이 쓰겠다. (89. 10. 25. 수)

    민진이는 일기를 느낌이나 생각으로 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디서 이런 것을 배웠을까? 혼자서 깨달아 알게 된 것일까? 이 아이의 어머니가 선생님인 모양인데 어머니가 느낌고 생각으로 글을 쓰라고 지도했을 것 같기도 하다. 느낌과 생각이 풍부한 좋은 글이 되었으니, 이 일기장을 책으로 내었겠지.
    만약 느낌이나 생각이 많이 담겨 있어야 좋은 글이 된다면, 다음과 같은 글은 어떻게 평해야 할까?

    옛날 이야기
    2학년 이새롬
    3학년 6반 선생님이 오셔서 큰북과 작은북을 쳐 주시고, 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참 큰북과 작은북을 잘 치셨다. 선생님께서는 어깨를 번갈아 만지셨다.
    “나에게는 주머니가 두 개 있는데 이 쪽은 음악 주머니이고, 이 쪽은 옛날 이야기 주머니…….”
    “옛날 이야기 해 줘요.”
    “조용해 봐, 이 옛날 이야기는 지금부터 하면 밥도 안 먹고 밤을 새서 방학 끝날 때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재미있어. 이 이야기 들으면 여자들은 화장실 혼자 못갈 걸.”
    더 궁금해졌다.
    쉿!
    “왜 화장실에 갈 때 노크해야 하는지 알아? 이제 왜 화장실에 갈 때 노크해야 하는 지 가르쳐 줄게. 옛날에는 화장실에서 밑을 쳐다보면 똥이 다 보이는 구멍이 있지? 그 구멍에서 칙부인이 긴 머리와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노크를 안 하고 사람이 들어오면 칙부인이 그 사람을 구멍 속으로 사라지게 해. 노크를 하면 칙부인이 구멍으로 내려가 한 손에는 똥을 받고 한 손으로는 오줌을 받아. 그러니 노크를 꼭 해야 돼.”
    그 다음은 화장실에 갈 시간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두명씩 붙어서 다녔다.
    (90. 12. 15. 토)

    기분좋은 날
    2학년 이새롬
    선생님께서 아침에 교실에 들어오셨다.
    “내일은 오빠 언니들이 시험보니까 차가 막히지 않게 우리들은 10시까지 와야 돼요.”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내일은 ‘지각되지 않게 일찍 가야지.’를 ‘조금 더 늦게 가야지.’로 고치세요.”
    “와! 와…….”
    교실이 떠들썩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호범이가 나섰다.
    “그럼 늦게까지 공부해요?”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니.”
    교실은 다시 수다쟁이로 변했다.
    (90. 12. 17. 월)

    이 글들에는 느낌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읽는 사람에게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잘 그려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보고 듣고 겪은 일(사실)을 생생하게 그려 보여 주는 글이 좋은 서사문이다. 이런 아이에게 ‘느낌과 생각으로 글을 쓰라’고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오해없기 바라는데, 새롬이가 언제나 느낌을 적지 않고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위의 글 두 편은, 느낌과 생각을 쓰지 않고도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보기로, 일부로 느낌이 거의 담겨 있지 않은 글을 뽑은 것이다.)
    느낌과 생각으로 글을 쓰지 않고 오직 사실만으로 글을 쓰는 보기로, 어느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이기로 한다. 작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헝가리 사람이고 소설 제목은 <비밀 노트> 이다. (인용문은 두 가지 번역본을 견주어서 우리 글투로 약간 다듬었음)

    〔우리가 ‘잘 썼음’이나 ‘잘 못 썼음’이라고 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글의 내용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 우리가 본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한 일만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 같다.’고 써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한다.’고 써야 한다.
    ‘이 작은 도시는 아름답다.’고 쓰는 것도 안 된다. 왜냐 하면 이 작은 도시가 우리에게는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고 쓴다면, 그건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에게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쓴다. ‘당번병이 우리한테 이불을 갖다 주었다.’
    또, 우리는 ‘호두를 많이 먹는다’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고는 쓰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말은 뚜렷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에는 정확함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 ‘엄마를 좋아한다.’에서 ‘좋아한다’는 말은 뜻이 다르다. 앞 글에서는 입 안에 느끼는 맛을 좋아하는 것이지만, 뒷 글에서는 감정을 나타낸다.
    느낌을 나타내는 말은 매우 막연하다. 그런 낱말은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말고, 사물이나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곧 사실에 충실한 묘사에 그쳐야 한다.〕

    이 소설은 열 살짜리 쌍둥이가, 자기들이 겪은 일을 쓴 작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소설 전체가 느낌이나 생각을 전혀 담지 않은 예순 두 편의 서사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문은 이렇게 사실로만 써야 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서사문 쓰기 지도에서는 느낌에 대하여 너무 강조하지 말고, 사실을 충실하게 쓰도록 지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야가와는 그의 책 <의미론>에서, ‘그는 착한 사람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하고 생각하는 단정은 생각을 정지시키고 사람을 일시적인 맹목 상태로 끌어 넣는다고 말한다. 단정은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낡은 문구가 신선한 서술을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단정을 피하고, 그 대신 관찰한 사실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야가와가 말하듯이, 단정은 객관적인 글쓰기를 가로막는 요소이다. 따라서 느낌이나 생각으로 글을 쓰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가로막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감각 교육이 글쓰기, 그리기 같은 표현 교육과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 사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쓰는 지도가 아이들을 실제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과 반대로 느낌과 생각으로 글을 쓰게 하는 가르침은 아이들을 관념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또한, 하야가와의 지적대로, 단정이나 느낌으로 글을 쓰면 상투적인 표현이 되기 쉽다. 흔히 저학년 아이들의 일기 끝부분에 나오는 ‘참 재미있었다’는 얼마나 틀에 박힌 문구인가.
    느낌과 생각으로 글을 쓰라고 하지 말고, 사실을 정확하게 붙잡아 쓰는 글쓰기지도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서사문에서 느낌이나 생각을 쓰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일을 자세히 쓰고, 그 일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느낌이나 생각을 썼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고 생생하게 붙잡아 썼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였다.
    “서사문을 쓸 때 사실을 잘 그려 보이도록 지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느낀 것도 쓰라고 지도해야 좋은 글이 되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글을 쓸 때 느낌을 쓰지 않으면 영 글맛이 나지 않는 글이 되던데요.”
    물론 느낀 것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느낀 점을 쓰라고 자꾸 강조하는 것은 좋은 지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거짓스런 느낌을 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느낌을 쓰지 않은 글은 글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 느낌을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강한 느낌을 받게 된 상황을 쓴 글이 아니거나, 그런 형편을 썼더라도 정확하게 붙잡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일을 평범하게 썼는데, 읽는 사람이 감동을 받는 경우란 없을 것이다. 자기 마음을 크게 움직인 일을 썼더라도, 그 일을 본 대로 들은 대로 겪은 대로 정확하고 자세하게 붙잡아 쓰지 못한 글이 읽는 사람에게 ‘참 그렇구나’하는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느낌 그대로 하지 말고, 사실로 간접으로 써서 읽는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선생님은 화가 났다’고 쓰는 것보다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서 선생님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와 같이 관찰한 것을 쓰면 더 생생하고 읽을 맛이 나는 글이 되는 것이다.

    3. 흐리멍텅한 글과 또렷하게 보여주는 글

    도시 아이들이 쓰는 글은 흔히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글로 되어 있지 않고, 어떤 일을 흐리멍텅하게 설명하는 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에 어느 글짓기 학원에서 지도한 문집을 보니, 거의 그런 글로 되어 있었다.
    오민진의 일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제대로 된 서사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겪은 일을 정확하게 붙잡아 쓴 글이 없을 뿐 아니라 ‘왜냐 하면’ ‘그 이유는’ 하는 식으로 자꾸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가 아주 많이 눈에 띄었다. 몇 군데만 들어보면.

    오늘 나는 내 동생과 말다툼을 하였다. 그 이유는 내가 책상 정리를 할 때 내 동생이 나에게 물을 뿌렸다. (89. 10. 29. 일)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아기를 낳으셔서 그렇고 다른 이유는 선생님이 바뀌면 우리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렇다. (89. 11. 1. 수)
    오늘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나는 고모 생각이 난다. 왜냐하면 고모가 연극 공연을 하였기 때문이다.
    (89. 11. 4. 토)
    오늘 나는 아침에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우리 아빠 생일이다. (89. 11. 15. 수)
    오늘 나는 치과에 갔다. 이유는 이빨 윗몸이 퍼렇게 멍든 것 같기 때문이다. (90. 2. 7. 수)

    이런 식이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자꾸 이유를 설명하려 드는 태도는 도시 아이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쓰는 까닭이 무엇일까? 어쨌든 좋은 글버릇은 아니다.
    민진이의 일기에는 친구 이야기가 여러차례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대부분 친구 이름을 적지 않고 있다.

    오늘 내가 학교로 갔더니 내 짝(여자)이 “민진아, 이리와 봐.”하고 말하였다. (89. 11. 30. 목)
    오늘 내가 학교로 갔더니 내 남자 짝이 나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불렀다. (89. 12. 4. 월)
    오늘 내가 학교로 갔더니 우리 반 친구들은 자습도 안 하고 놀기만 했다.
    내가 내 친구 옆에 다가가서 왜 우리 반이 자습도 안 하고 놀기만 하냐고 물어봤더니 내 친구는 “오늘 방학식인 줄 모르니?”하고 말했다. (89. 12. 19. 화)

    이렇게 친구의 이름을 밝혀 적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야가와는 <의미론>에서 ‘말은 그 말이 대신하는 사물과 사건에 우리의 말을 정확하게 관련시키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추상의 사다리’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똑같은 대상도 ‘베시(특정한 암소의 이름)-암소-가축-농장-재산…….’ 이런 식으로 추상의 수준을 다르게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추상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사물이 지닌 고유한 특성들은 생략된다.
    초기 단계의 교육일수록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어린 아이에게 말을 가르칠 때도 우리는 가장 낮은 추상의 수준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림을 보여 주고 ‘물고기’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붕어’라고 가르쳐야 한다. ‘과일’은 막연한 말이다. 수박이면 ‘수박’, 사과면 ‘사과’라고 또렷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할 때도 마찬가지로 될 수 있으면 구체적으로 쓰게 해야 한다. ‘생선을 먹었다’는 글은 막연하다. 고등어를 먹었는지 꽁치를 먹었는지 다른 어떤 것을 먹었는지 알 수 없다. 거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권정생 선생님은 언젠가 ‘이름 없는 들꽃’은 없다고 말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정확한 이름을 적게 해야 한다.

    민진이는 일기를 쓸 때 거의 ‘오늘’로 시작하고 있다. 보통 일기를 쓸 때 ‘오늘’이나 ‘나는’같은 되풀이되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이런 지도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늘’이란 말은 되풀이되는 말이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할 말이 아니라, 막연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써야 할 말이다. 일기는 ‘오늘’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므로, ‘오늘’이라고만 쓰는 것은 쓰나 마나 한 말이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점심 시간인지, 오후인지, 저녁인지, 밤중인지, 때를 더 자세히 밝혀서 쓰도록 해야 한다. ‘나는’이라는 말도 쓰지 않아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필요 없는 자리에 쓰는 것은 빼도록 가르쳐야 하겠지만, 빼면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흐리멍텅한 글과 또렷하게 보여 주는 글의 차이를, 비슷한 글감으로 쓴 민진이의 일기와 새롬이의 일기를 견주어 살펴보자.

    결혼식
    3학년 오민진
    오늘 나는 결혼식에 갔다.
    옛날식으로 했다.
    결혼식을 시작할 때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끝날 때는 기분이 나빴다.
    끝나고 10분 기다리니까 고모가 왔다.
    나는 고모한테 달려갔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우리 고모가 제일 좋다.
    우리 고모가 왔을 때 우리는 음식점에 갔다.
    오늘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 다음 우리 삼촌이 신혼여행을 갔다.
    “안녕!”하고 나는 말했다 (89. 10. 1. 일)

    예식장에서 본 일
    3학년 이새롬
    이모뻘 된다는 어느 엄마 친척인 언니의 결혼식 날이었다. 1시 30분쯤에 ‘남부 예식장’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의자에는 앉지 않고, 뒤에 문쪽으로만 몰려 들었다. 그래서 의자에 앉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신랑, 신부는 평생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날인데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떠들지? 조용히 하고 의자를 꽉 채우면 자기 자신과 신랑, 신부도 기분이 좋을 텐데.’
    그리고 식사 후 예식장 앞에 있던 축하꽃이 필요없게 되자 꽃을 막 뽑아갔다. 서로 먼저 꽃을 많이 가지려고 막 뽑아서 없어지자 달려 있던 리본까지 가져갔다. 순식간에 예식장 앞에는 사람들에게 밟힌 꽃들과 떨어진 나뭇잎 같은 것들로 더러워졌다.
    아이, 정말 왜 그러는 걸까? 저런게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본 모습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아무리 예의를 모르는 나라도 오늘 있었던 일만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다간 선진국은커녕 1등 후진국이라고 듣게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제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92. 1. 5. 일)

    이 두 편의 일기는 모두 서사문으로 되어 있다. 민진이는 글을 쓸 때 줄을 전부 바꾸어 쓰고 있다. 단락을 지어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구상을 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민진이 글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결혼했는지도 나타나 있지 않다. 일기 끝부분을 읽으면 삼촌의 결혼임을 알 수 있지만, ‘오늘은 너무나 재미있었다’에서 이 일기는 끝나 있고, 뒤에 두 줄은 어른의 지시로 덧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혼식의 모습도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느낌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나빴다’ ‘재미있었다’하고 막연하게 쓰고 있다.
    새롬이는 언제, 어디서, 누가 결혼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결혼식장의 모습도 잘 그려져 있고, 자기가 본 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써 놓고 나서 느낌을 말하였다.
    두 글 가운데 어떤 글이 흐리멍텅하고 어떤 글이 또렷한 글인가, 어느 아이가 자기 주위의 일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잘 보고 있지 않으면, 잘 듣고 있지 않으면 흐리멍텅한 글밖에 쓸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을 자세하게 쓰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느낌이나 생각으로 글을 쓰는 지도를 받고서는 이렇게 흐리멍텅한 글밖에 쓸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이주영 06-02-10 03:38
     
      지도교사-이성인 선생님